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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09. 2018

시간이 뭐라고



시간은 그 시제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의해 각색된다. 시간을 아끼고, 활용하고, 보내는 등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의 일상을 ‘시간’에 대입한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은 활용해야 할 가치가 되어버렸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시간은 단축한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흘러간다. 시간의 물살을 타서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제때 가고 싶지만 어느 지점에서 어떤 물살을 타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물살에 몸을 싣지 않고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것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싶다. 시간이 물결 같은 거라면 우리는 이미 어느 결인지 모를 물살에 기대 숨도 쉬고, 유영하면서 부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방학이 될 때마다 시간표를 만들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숫자를 쓴 후 하루 일과를 채웠다. 간식 먹는 시간까지 꼼꼼하게 챙긴 시간표를 문이나 책상 앞에 떡 하니 붙여놓고, 방학이 다 끝날 때까지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시계 모양의 종이는 그저 시간을 잘 보내겠다는 숙제이자 귀여운 증서였다.   


방학 시간표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어느 시점부터는 유년 시절처럼 계획표를 짜지 않고 일기를 썼다. 지금도 매일 월별 달력에 일정과 계획을 적고, 뒤에 있는 주간을 일기로 쓰는 다이어리를 갖고 다닌다. 사실 일기는 유용하지 않다. 요즘은 글쓰기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쓰고 있지만 대부분은 하루의 일과를 적거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휘갈기는 정도이다. 가끔 예전에 쓴 다이어리를 보면 실소와 함께 민망함을 느낀다. 읽으면 읽을수록 시간을 성실하게 활용하지 못한 개인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빈 일기장에 또 다른 시간을 계획하고 기대하길 반복한다.    


얼마 전부터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서점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날이나 오전에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주문을 하고 당일 출고로 받는데 왠지 그마저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책을 보유하고 있는 서점을 찾으니 마침 딱 한 곳에 한 권이 있었다. ‘1’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꼭 서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살 기운 때문에 하루쯤 쉬어야 했지만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잗다란 가랑비가 내렸고, 오후의 거리는 한산했다. 탄천 길을 따라 쭉 걷다가 지하철로 한 정거장이면 갈 곳을 4.8km나 걸었다. 그 덕에 비 오는 날의 선명해진 봄꽃과 나무를 실컷 볼 수 있었다. 땅 밑으로 부리를 저으면서 벌레를 찾는 까치, 잎이 더 길어진 버드나무, 낮은 지대에 물에 잠긴 잡초와 민들레꽃을 지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성해진 토끼풀 더미를 관찰했다.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다 말고 다시 걸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걸어 종이 냄새가 가득한 서점에 도착했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서가에서 찾던 책을 집어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물류창고에서 접수되고, 운송장 번호와 배송 예상시간을 확인하면서 책을 받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단축하지 않은 덕에 얻은 즐거움이었다.     


사람들은 만듦새가 좋은 물건을 제작하듯 시간을 잘 다루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시간 탓을 한다. 있고, 없고, 모자라고, 긴박한 무엇으로 치부한다. 물론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꼭 해야 할 일을 미리 함으로써 남는 시간은 여러모로 이득이다. 문제는 미리 당긴 시간만큼 또 시간을 당기려 든다는 것이다. 가끔은 시간을 단축하려고 애쓰는 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효율성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직접 해도 될 일을 간소화해서 점점 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고, 경험의 진폭을 얕게 한다. 세상은 점점 개인의 속도와 상관없이 시간을 유용하게 관리할 물건을 생산하고,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하루를 48시간처럼>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을까. 뭐든 시간에 대입해서 산출하는 결과값은 과정의 지난함을 덮어두고 허무함을 남긴다. 매번 비슷한 계획을 늘어놓고, 후회와 반성을 넘나들면서도 다가오는 시간에 기댄다. 시간의 물살에 떠 있는 건 다만 휩쓸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다리에도 있다.  조금 서투르지만 분명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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