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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ug 06. 2018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마음

또치야 사랑해



서로의 기억에서 잊고 잊힌다는 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웃으면서 기억하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떠오르자마자 지우고 싶은 대상이 있다. 누군가 “당신은 왜 사나요?”라고 묻는다면 사는 동안 서로의 기억에 어떤 점을 찍기 위함이라고 어렴풋이 생각난 듯 말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이 될지 조금이라도 의식하면서 살다 보면 기억을 구체화하지 않아도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사람은 될 거라고 말이다.


만남과 이별은 둘 다 우연성을 전제로 하면서 이어져 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이별을 향해 간다. 서로가 만난 곳이 출발 지점이 되는 길에서 함께 또는 각자 나아가고 있다. 함께한다고 해도 자신의 호흡으로 걷고 멈추고 뛰고 있다. 한편으로 누군가 나처럼 걷거나 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우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앞만 보지 않고 주변을 바라보면서 걷는 길이다. 어른이 되고 점점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 잦아질수록 내가 발붙인 세상의 무게가 중량을 더해간다.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지는데 그저 내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 어딘가 쓸쓸하다.      


얼마 전 아끼던 강아지 또치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남편이 남자 친구인 시절부터 키우던 몰티즈인데 시아버지 회사에 계시던 차량 기사님의 집에서 낳은 새끼를 분양받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물에 불린 사료를 먹으려고 집중하느라 짧은 다리가 연신 들릴 정도로 자그마했던 또치. 여자 친구일 때도 우리 집에 자주 와서 가족들에게도 식구가 되었다. 공놀이를 좋아해서 한번 던지기 시작하면 숨을 헐떡이면서 빨리 던져 달라는 듯 손에 든 공을 쳐다보았다. 앞발로 공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또치는 시댁에서도 누나를 가장 좋아한다고 인정할 정도로 나를 잘 따랐다. 함께 살지 않았어도 가끔 우리 집에 오면 매일 한 이불을 덮고 잔 형보다 나를 더 격하게 반겨주었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시선이 느껴지고 눈이 마주치면 곧장 다가와 책상에 올려달라고 두 발을 내 다리 위에 얹었다. 함께 있어도 더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화장실에서 빨리 나오지 않으면 문 앞에서 다리를 뻗고 지루한 표정을 했다. 가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강아지 형상을 한 남동생 같기도 했다. 말이 없는 동물이라고 함부로 대한 적도 있다. 꼬리를 한껏 말고 슬금슬금 거리를 두며 눈치를 보다가도 한참 뒤에 내 마음대로 기분이 풀려서 이름을 부르면 속도 없이 달려와 주었다. 내가 내어준 마음보다 또치가 조건 없이 내어준 체온이 더 따뜻했다.


강아지는 참 신기하다. 애정을 갈구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에게 사랑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애초에 숨긴다는 표현 자체도 그 모양을 이해하려는 사람의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봤고, 그 말뜻이 뭔지 알 것 같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생기는 의혹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숨기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과 다르게 대한다. 아니면 아예 관계를 단절한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각자의 상황과 이해관계를 완전히 배재하기는 어렵다. 강아지는 어떤가. 사람으로부터 학대받거나 버려진 강아지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지난 6월, 우리 집에서 지낸 한 달이 또치와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심장병 때문에 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여야 했는데 가루약 냄새 때문에 꿀을 섞어 주면 바로 먹지 않고 도망을 갔다. 그런 모습이 힘들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또치는 자주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공놀이도 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배변 실수도 잦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처음처럼 반겨주는 건 그대로였다. 그 낮은 눈높이에서 자신의 작은 체구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보여줬다. 순수함이 하나의 결정체라면 분명 또치의 눈동자에도 깃들어 있을 거다. 이렇게 자주 과장된 액션을 취하면서 나를 좋아해 줄 존재가 앞으로 또 있을까 싶다. 자꾸만 반성문을 쓰는 기분이다. 또치가 떠나니 잘 해주지 못한 것만 떠오른다. 나는 슬픔을 통과하는 시간을 겪는 중이다. 그런데 이 뿌연 마음을 서두르듯 끝내고 싶지는 않다.


어릴 때 자주 보던 만화영화 ‘둘리’에는 타조인 친구 또치가 나온다. 나는 또치라는 이름을 원래 좋아했다. 만화영화 속 또치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부르던 노래에서 “또치 또치 또또치”라고 하는 리듬이 좋아서 훗날 강아지로 만난 또치에게도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부드럽고 작은 앞발을 들어 맞잡고 장난스럽게 춤을 췄다. 또치에게 나는 어떤 기억이 되었을까. 보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불러 봐도 나를 반겨줄 또치가 이젠 없다. 어쩌면 기억은 존재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얻는 대가로 치르는 형벌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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