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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Sep 08. 2017

그들 각자의 이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외면하기도 한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흩어진 여러 감정을 불러오게 되고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껴야 한다. 무대 장치를 바꾸듯 감정을 재배열하고 해석한다. 결론이 나지 않아서 다시 생각인 채로 두고 지나갈 때도 있지만 지나친 해석으로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두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감정의 근원을 말로 쉽게 정의해 버리는 게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다 보면 감정의 이유를 단정 지을 때가 있는데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급하게 포장을 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이 싫어서 생각을 말자로 끝내고 잊어버리는 쪽을 선택할 때도 있다. 다만 생각을 하지 않아서 일어나지 않은 감정들은 꿈으로 각색되어 찾아올 때도 있다. 새 것인 물건이 없듯 새 것인 감정도 없다. 바래고, 젖고, 먼지가 쌓여간다. 흔히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하는 말은 기억이 조금씩 망각되어가는 데서 오는 편안함일 것이다. 가끔은 기뻐하고 설레어하는 일들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떠오르고 잊는 것이다.    

  

혼자만의 감정이 아닌 타인과의 감정 선이 얽힌 경우는 더 참담하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정리해본들 상대의 감정이 내 마음과 같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 관계는 아무런 감흥 없이 유예된다.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은 그나마 해소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여지가 없다면 관계는 끝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어떻게든 표현하는 쪽에 속하는데 말은 꼬리가 여러 개라서 내 속마음과 다르게 표현되고 상대방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오랜 시간 만나왔던 한 친구는 감정이 상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표현하지 않고 나를 외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시간은 이미 빛을 잃은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애써 외면해 왔듯 그도 상처받기 싫어서 감정을 잘라냈을 것이다. 그 친구의 인생에 나라는 사람은 어쩌다 부딪힌 모서리 같은 것일지도. 잠시 아프지만 다시 조심하면 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늘 먼저 표현했던 나 역시 결국 친구의 낌새를 느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로 방치하기로 했다. 그러니 둘 중 누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감정이 시시 때때로 명확한 수치로 환산되고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상상도 그리 시원하지만은 않다. 관계에서의 감정이 서로에게 너무 쉽게 설명되고 정의되어 버린다면 보다 덜 싸우고 적당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기분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감정이 쉽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과 감정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험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는 일의 어려움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관계를 끝낸다는 것은 얽혀있는 상대를 배제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겠다는 선포로 이해된다. 자신의 인생에서 상대의 존재를 잘라냈다고 온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도 매번 화를 내거나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절에 암묵적으로 응한 나는 서로의 빗나간 감정을 대화로 풀 기회조차 걷어차 버린 셈이다. 반대로 대화를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생을 풀리지 않을 감정과 생각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피로한 일이다. 다행히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히기에는 일상은 사소한 일들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다. 먹먹한 감정은 각자의 마음 어딘가에 아무런 반응 기제 없이 머무르다가 언젠가 서로의 감정이 끊긴 자리에서 존재와 함께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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