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의 장례식
이 글은 언니가 동생에게 하는 일방적인 대화와 자살 유가족의 애도 과정 및 우울증과 심리적 변화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글의 중간에 당시 작성했던 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23살의 내가 주워 들어 알고 있는 장례식은 고인이 운명한 뒤 조문객은 연락을 받고 검은 옷으로 장례식장에 가서 상주와 인사하고 절을 하고 조의금을 내고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생애 첫 장례식장이 얄궂게도 여동생의 장례식장이었고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구도 시신의 코와 입을 솜으로 막는다고, 냉동 안치실에서 나온 얼굴이 보라색이라고, 화장 후 유골은 완전한 가루가 아닌 뼛조각이 남아있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한 번쯤 먼저 다른 장례식장에 가봤더라면, 또는 학교나 다른 누군가가 장례식에 대해 가르쳐 줬더라면 조금 받아들이기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언젠간 있는 거니까, 혹시라도 나같이 난감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장례식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내가 겪은 장례식은 과정이 생략된 것이 많고 각 가정의 의견과 종교, 상황에 따라 장례 절차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고인이 운명한 뒤 사망진단서를 받고 병원이나 장례식장으로 이송하여 시체 안치실에 보관한다.
조문객들에게 부고를 전하고 빈소를 마련해 조문객들을 맞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가족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빈소를 마련하지 않고 가까운 친지들과 지인들만 연락하여 장례과정을 함께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사람이 동사무소 같은 기관에 가서 사망신고를 한다.
상주와 가족들은 관과 수의와 꽃, 빈소, 음식, 납골당 등의 종류와 금액을 선택하고 계산하며 영정사진을 준비한다.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는 기간은 보통 이틀이고 삼일 째에 입관하기 전 고인의 시신이 삼베수의가 입혀진 상태에서 친지들이 마지막으로 만나도록 해준다.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국화를 몸 위에 놓는다.
다음 날 새벽에 발인이 진행된다. 관을 옮기는 과정을 발인이라 하는데 관을 장의차에 모셔 화장터에 가고, 그 뒤를 다른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따라간다. 화장터에 가면 순서를 따라 정해진 시간에 관이 옮겨서 화장되고 관망실에서 사람들이 절차를 지켜보고 한두 시간 동안 화장되기를 기다린다. 유족대기실이나 관망실에서 화장이 끝나면 미리 준비한 유골함에 유골가루를 담아 상주가 든다.
납골당에 가서 비용을 결재하고 유골함을 안치하고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투명한 유리를 사방의 특수한 나사로 밀폐한다. 납골당이 아주 넓기 때문에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거나 적어두는 것이 좋다.
경우에 따라 삼일제와 사십구제 등을 치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나는 제대로 운 적이 거의 없다. 숨 쉬는 공기가 낯설었고 어떤 것도 기존의 것과 냄새와 온도와 색채가 어긋나 있었고 이 상황이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장례식을 치렀다. 실감이 난 순간은 화장터의 대기자 스크린에 동생의 이름 석 자가 뜬 것을 봤을 때였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동생이 죽기 전 그 당시 나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7년 전, 내가 17살이고 동생이 11살일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 셋이 한 집에 살았고 아빠와는 따로 살며 주기적으로 만나왔다. 어린 동생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나도 동생을 세상에서 가장 아꼈고 다행히도 나를 잘 따랐다.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가깝게 지냈다. 동생은 자기 방을 두고 괜히 내 방에 와서 거의 한 방에서 지냈지만 싸운 적이 손에 꼽았다.
스무 살이 되어 내가 지방의 대학에 입학하며 따로 살기 시작했다. 아빠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랭함에 22살부터 연락을 끊었고 엄마는 두 딸을 혼자 키우는 것이 버거웠는지 맏딸인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아졌으며 화가 나면 인격적인 폭언이 점점 심해졌다. 한 번 그렇게 터지고 나면 스트레스로 이삼일간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견디기가 힘들었고 엄마의 연락을 오랜 기간 받지 않을 때가 잦았다. 동생은 엄마와 계속 같이 살았다. 내가 없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작년 봄,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의 이상한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내가 아는 동생이었는데 엄마에게 연락이 와서 자꾸 학원을 빼먹고 학교에 수시로 지각한다고, 내 말은 잘 들으니 잘 말해보라고 부탁했다. 내가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물어도 그냥 늦잠을 잤다고, 자기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길래 정신과 진료를 권해주었고 엄마에게도 그렇게 말해놓았다. 걱정을 하면서도 4학년인 나는 졸업준비에 바빠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아무도 몰랐지만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엎질러진 물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문제가 드러나고 전체가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꼭 고장 난 기계처럼 이따금 지지직거리고 오작동을 일으키는 순간이 있지만 사춘기이니 방황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남들과 조금 달라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동생이 점점 바뀌어 갔고 자퇴를 원했지만 엄마는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 불안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동생의 핸드폰을 열어서 모든 것들을 봤고 동생이 나와 똑같이 동성의 여자 친구를 사귀었으며 담배를 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 내가 가르치거나 유도하지 않았고 그저 비밀이 없는 사이기에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엄마는 나쁜 영향을 다 나에게서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동생이 잘못되면 다 나의 책임이니 죽여버리겠고 했다. 그 뒤로 엄마가 있는 본가에 가지 않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던 동생은 그해 초여름 일주일치 처방받은 정신과 약을 한 번에 다 먹고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실려갔다. 위세척을 받고 그다음 날 대학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2019년 8월 **일 목요일 밤 10시 45분
동생이 세상을 떠남
몇 시일까 대체
8시? 7시? 6시?
그때 난 뭘 하고 있었지?
금요일
입관
손이 딱딱했고 얼굴이 보라색으로 얼룩덜룩
코와 입이 솜으로 막혀있음
토요일
발인 화장, 납골당 안치
월요일
삼일제, 제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