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디자인 적응기 #1
쿽을 사용해 책을 만들 때는 인쇄용 파일을 모아 전체 파일이 모인 폴더를 압축해 필름 출력소에 보내야 했다. 인디자인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작업 완료하고 파일 패키지한 폴더 자체를 필름 출력소에 보내야 했던 거다. (왜 인쇄소가 아닌 필름 출력소로 보냈는지 궁금하시면 05. 출력소? 인쇄소?를 읽어보시면 돼요. ㅎㅎ) 당시에는 이미 인디자인 4.0이 활용되고 있었지만 서체 문제나 프로그램 비용 문제 때문에 국내 출력소나 인쇄소들이 인디자인을 사용하지 않고 쿽을 사용하던 시기라 국내 출판사들은 쿽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파일을 보낼 때는 메일로 보내기에는 파일 크기가 컸기 때문에 필름 출력소의 데이터 서버 주소로 접속해 업로드했다. (다른 장소에 있는 컴퓨터끼리의 FTP 업로드 개념으로 보면 된다.) 업로드해놓고 퇴근시간 됐다고 바로 퇴근하면 안 된다. 꼭 데이터 확인해 달라고 연락하고 손상되거나 유실된 파일은 없는지 체크하고, 손상된 파일이나 유실된 파일 또는 서체가 있다면 보내 준 뒤 그 파일들이 이상이 없어야 퇴근이다. (그리고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필름 출력된 걸 검판하러 충무로 가는 거다. ㅎㅎㅎ)
번거롭지만 책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이 과정만을 알고 있던 이때, 난 인디자인의 간편함과 PDF 파일 하나만 보내면 책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입사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종류의 책을 하나 맡게 되었다. 미국 출판사에서 만든 그림책의 국내 번역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페이지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고, 글은 한두 문장이 드문드문 있는 책이었다. 그림이 매력적인 데다 새로운 작업을 한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책이었다.
번역서 작업을 하게 되면 우선 실제 원서본과 원서의 파일을 받는다. 그때는 메일로 주고받기에는 인터넷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 (2000년대 중후반 외국에서 살아보신 분들은 아실 거다. 인터넷 종량제에 너무너무 느린 인터넷 속도를... 우리가 계약한 책의 출판사는 미국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이었음에도 메일로 보내기보다 CD로 보낸다고 하더라.) 그래서 CD를 기다렸다. ㅎㅎㅎ
CD를 받고 보니 파일 아이콘이 모르는 애가 붙어있다. 확장자도 처음 보는 애다. 주변에 물어보니 '인디자인'이란다. 그전에도 지나가듯 들었을 수도 있지만 인디자인을 제대로 인지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책 작업을 하려면 원서 파일부터 열어봐야 하니 인디자인 사용법 검색부터, 프로그램 찾고, 설치까지 하는 게 첫 과정. 설치하고 파일 열었더니 서체가 없다고 해서 원서 출판사에 서체 요청해 받은 게 다음 과정. 서체 설치하고 다시 열어 드디어 온전한 파일 구경. 생전 처음 보고 다뤄보는 프로그램, 파일에 정신이 없더라.
그때는 인디자인을 전혀 몰랐기에 정말 '구경'만 했다. 구글로 검색해서 필요 메뉴 위치 확인하고, 원서 페이지 크기 확인하고, 문장들 위치와 글자 크기, 그림 위치만 확인하고 인디자인은 종료. 확인한 틀 그대로 쿽에서 마스터 짜고, 쿽에 넣을 수 있게 jpg로 받은 이미지 파일을 eps 파일로 변환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은 쿽에서도 jpg나 ai 파일 삽입이 가능하지만 그때만 해도 쿽은 오로지 tif와 eps 파일만 삽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인디자인은 jpg, ai 파일 삽입이 가능하다는 게 정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쿽으로 전체 내용을 앉히고 정리를 하고 난 다음 관건은 인쇄용 파일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다. 이 책은 원서 출판사가 지정한 인쇄소에서 인쇄해야 했다. 그리고 보내는 파일은 PDF로 보낼 것. 그래서 난 우리 회사 누구도 해보지 않은 쿽에서 PDF 만들기에 도전해야 했다! 이때만 해도 난 쿽에서도 PDF 파일을 만들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우리가 인디자인을 사용한다면 간단하게 끝났을 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그건 불가능했으니 쿽으로 어떻게든 만들어 볼 수밖에. 이런 때 역시 구글은 최고의 친구! ㅎㅎㅎ
뒤져보니 쿽에서도 PDF 변환이 가능하더라. 그런데 처음 하는 작업이다 보니 생소해서 많이 헤맸다. PDF 변환할 때 설정해야 하는 조건들도 하나도 모른 상태에서 원서 출판사에서 보낸 설정 가이드(작업 자체도 생소한데 영어....ㅠㅠ, 거기다 인디자인 영문판에서 설정하는 화면 캡처... 내가 쓰는 건 쿽 한글판...) 붙잡고 정말 한 땀 한 땀 찾아가면서 했다. ㅋㅋㅋㅋ 많이 헤매긴 했지만 새로운 경험인 데다 나중에 좀 더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향을 알게 되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작업이다 보니 마감할 때 혹시나 파일 잘못될까 봐 정말 많이 예민해지긴 하더라. 우왕좌왕하면서도 결국 마감 일정 맞춰 마지막 정리까지 완료하고, 최종본 PDF 파일 만들어 마감하니 그 기분은 정말 뿌듯했었다.
이때 살짝 맛본 인디자인과 PDF의 편리함을 잊지 못해 회사에다 '인디자인 배우게 해 주세요~' 노래를 불러 결국 회사 1호로 인디자인을 배웠다. ㅋㅋㅋㅋ (그게 벌써 십몇 년 전이라니 시간 정말 빨리 지나간다.) 이후로 우리 책 작업을 할 때도 쿽에서 PDF로 보내면 안 되나 물었더니 출력소들이 환영하는 방법이 아니라서 안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쉽게도 쿽에서 PDF를 보낸 경험은 이때 한 번뿐이었지만, 모르는 일에 부딪혀서 성공했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때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하면서 어느 정도 배우고 앞으로 경력이 쌓이면 새롭게 배우는 거 없이 알고 있는 걸로 먹고사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배워야 하는 건 끊임없이 늘어만 가는 것 같다. 예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것들이 쏟아지고 계속 배우고 공부해야 살아남는 시대라니. 다행히 계속 모르는 걸 찾고 배워가며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또 다른 것들을 배우는 게 많이 힘든 일은 아니지만 내 소원대로 죽을 때까지 디자이너하기 위해 앞으로도 공부해야 할 것들이 쌓여있다고 생각하니 좀 까마득하긴 하다. 그저 내 체력이 계속해서 받쳐주기만을 바랄 뿐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