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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시인 May 13. 2020

겨울이었다 (1/2)






겨울이었다. 당신의 하루를 빌린 그날은.

구름이 낀 날이었다. 눈이 곧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당신은 하나도 춥지 않다며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서 밖을 나섰다. 나도 당신을 따라나섰다. 당신은 이쁜 구름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종종 길을 잃어버린다고도 했다. 나는 따라가기로 했다. 구름은 생각보다 빠르고 우리의 걸음은 생각보다 느려서 구름을 놓쳐버렸다. 구름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불안해서 당신을 바라보았는데, 당신은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같이 떠나버리지 않아 나는 안도를 했다. 당신은 이제 춥다고 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왔다. 우주정거장에서처럼 견고하고 하얀 문은 기압을 빼내는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들어서자마자 탈의실 같은 것이 있었고 옷과 소지품을 다 맡겨놓아야 입장할 수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안은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맨발이었으므로 바닥의 질감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햇빛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 폭신한 땅에 발이 디딜 땐 따듯한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한 발자국 떼면 촉촉했던 흙은 공기와 마찰하여 서늘한 기운을 주지만, 다시 발을 내딛을 때는 반가운 온기로 맞이해준다. 당신은 냄새를 깊게 들어마셔 보라고 했다. 민감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도시와는 완연하게 다른 신선한 공기였다. 이곳에서만 지내도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멋대로 나있는 초록 잎들은 잘 가꾸어진 실내정원이 아니라 완벽한 숲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그중에서 호기심이 많은 잎은 천천히 걷고 있는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멈춰 서서 그 초록잎을 바라보았다. 잎은 천천히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당신은 잎을 만져보려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고 잎은 당신의 손이 닿자마자 작고 얇았던 모습에서 금세 커져버렸다.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제는 커진 잎은 당신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이번에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연잎처럼 변하여 가장 가운데서부터 투명한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어느 정도 차오르자 당신은 연붉고 긴 새끼손가락으로 맛을 보았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어주었다. 나도 당신을 따라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당신은 햇살도 하나 없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나무침대에 반쯤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그냥 책이 아니었다. 색 바랜 커다란 나뭇잎이 당신 앞 허공에 있었고, 다 읽고 손짓을 한 번 하면 나뭇잎에 새겨진 글씨 자국들이 지워졌다가 다시 새겨졌다.  나는 당신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책에 몰입하여 의식하지 않는 당신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밤이 오지 않은 이불처럼 가만히 있는 당신을 한참이고 바라보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쭉 뻗은 다리 끝은 아주 천천히 꼼지락거렸고, 발바닥에는 아까 밟은 흙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하고 싶어 졌다. 입을 동그랗게 말아 모아 비밀요원이 침투하는 것처럼 당신 발바닥에 천천히 바람을 불었다. 당신은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더니 시간이 지나 알아차렸는지 선글라스를 콧등에 내려 걸치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감상했다. 발바닥에 묻은 갈색 흙이 그곳으로부터 타고 올라와 불순물들을 다 씻겨 내버리고 이내 티 없이 투명한 수정에 채워졌을 때의 색일까. 생명을 보았다. 당신의 눈동자로부터.

 배가 고팠다. 당신도 뭐를 먹고 싶다고 했다. 잘 찾아보면 이곳에는 먹을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고 기다랗지 않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줄기를 손에 움켜쥐어 힘을 주어 뽑았다. 흙 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진한 주황색과 기다란 모양이 내가 잘 아는 채소 같았다. 언제고 밝을 것 같았던 조명은 금세 검정과 적색의 빛을 차례로 보여주더니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에 들어왔던 탈의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큼직하게 어느 문구가 적혀있었다. '소지품 반입 시 퇴장'. 이유는 당신의 선글라스 때문이었다. 당신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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