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시인 May 13. 2020

겨울이었다 (2/2)

 우리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도 우리를 따라왔다. 나는 깨끗한 물에 손을 씻고 요리를 시작했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오믈렛을 김치찌개처럼 시원한 토마토수프를 얼음처럼 차가운 연어샐러드를 그리고 시나몬 향이 듬뿍 담긴, 이 겨울에 어울리는 당근케이크 만들었다. 당근케이크는 엉겁결에 들고 나온 그 채소로 만들었다. 당신이 다 잘 먹는 것들로 준비했다.

 아까보다 더 구름이 많아졌다. 곧 무언가를 흩뿌릴 것 같은 구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여러 색 중에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무채색만 내려주었다. 당신은 따듯한 게 필요하다고 했다. 양초를 켜자고 했다. 양초는 우리를 주위로 따듯하게 타올랐다. 무채색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었다. 당신은 더 따듯한 게 필요했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난로 위 주전자에 와인과 과일 그리고 시나몬을 넣었다.  냄새는 곧 진동했다. 한잔밖에 없는 머그컵으로 우리는 한 모금씩 나눠마셨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에게 어깨를 빌려달라고 했다. 말은 하지 않았고, 한겨울 마지막 남은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당신에게 기대었다. 낙엽에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당신은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주었다.

 드디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컴컴한 하늘에 저 멀리 서있는 주황빛의 가로등 때문에 눈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은 일정한 속도로 그리고 일정치 않은 방향으로 세상을 덮어갔다. 꼭 우리의 시간 같았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노래들을 하나씩 번갈아 선곡하며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했다. 손이 찬 당신의 손을 그리고 하얀 당신의 손을 내 손으로 포갰다. 한 움큼의 눈 뭉치처럼 차가웠지만 녹지 않고 나의 온기만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는 당신과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눈물을 머금고 '나도'라고 말했다.

 밖의 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당신은 눈을 더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이번에는 차를 우려 머그잔에 담고, 모락모락 피는 김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처마 아래 위치한 벤치에 앉았다. 안에서 바라본 풍경보다 컴컴한 밤하늘은 더 컴컴했고 하얀 눈들은 더 희었다. 선명한 세상이 우리 눈앞에 있었다. 나는 눈 밟는 소리를 내기 위해 처마 밖으로 나가 발자국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당신은 웃었다. 그게 좋아서 난 더 우스꽝스럽게 굴었다. 털에 묻은 눈을 터는 강아지를 시늉하듯 촐싹거리기도 했고, 한 움큼 모은 눈을 주먹밥처럼 먹기도 했다. 당신이 웃었다. 정말 아이처럼 걱정 없이 웃었다.

 이미 반 즈음 눈사람이 된 채로 처마로 돌아와 당신 옆에 앉았다. 당신은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도 당신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눈에 반사된 아주 작은 빛이었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충분한 빛이었다. 작은 움직임 없이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당신이 천천히 다가왔다. 컴컴한 밤하늘에 더 컴컴한 암막 커튼이 쳐지고 당신의 입술은 내 눈두덩에 살며시 포개져왔다.

 당신의 피부는 모두 나보다 차가운 줄 알았는데 입술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반가운 온기에 나는 상기되었다. 다른 쪽 눈두덩을 코를 인중을 그리고 입술을. 우리는 입술이 포개진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일어서서 처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눈은 아까보다도 천천히 내렸다. 당신 머리에 당신 코트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당신의 몸의 색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화면에 그래픽이 깨지듯이 당신의 색은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소멸해갔다.

 당신이 서있던 그 자리에는 당신의 색을 모두 담은 색색의 눈들이 소슬히 쌓였다.




























 눈이 떠진다. 익숙한 조명이 방 전체를 감싸 안는다. 천장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노래를 안 끄고 잤는지 노래도 흘러나온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차분해서 좋아하는 시간인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면들이 너무 선명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다.


그때 스윽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눈도 그치고 추위도 사라지고

온기와 노랫소리만 가득한 방에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 일 없는 듯 숨소리만 내며 잠을 자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겨울이었다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