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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시인 May 28. 2020

봄이었습니다.


 낮에는 안보다 바깥이 더 따듯한 날에 꽃들은 질랑 말랑 이제 그만, 보러 나오라 속삭입니다. 나는 그 속삭임을 그대로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마다할 이유 없다는 당신은 이미 신발 끈을 묶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맑은 날의 소풍날 같고 평일에 개교기념일 같고 전날에 통지된 휴강 같고 갑자기 낸 연차와도 같습니다. 무얼할지 예상하고 예상대로 흘러가는 하루가 아니라 무얼 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 불안함이 아니라 기대로 가득 차게 될 때처럼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의 중간에서 만납니다. 날씨마저 봄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면서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냅니다. 그 병에는 술이 담겨있습니다. 술 마시며 걷기. 이건 나도 좋아하는 건데. 우리는 술병을 번갈아 쥐며 한 모금씩 한 모금씩 취해 길을 걷습니다. 어느덧 다다른 돌담길 모퉁이에서 커다란 나무 하나가 눈에 띕니다. 마침 봄의 온기를 머금고 다시 태어나고 있는 그 나무는 영험한 전설이 없어도 왜인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 같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 나무만큼 커다란 꿈이 생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자리에 서서 그 나무를 빤히 쳐다보고, 나는 당신의 반쪽 볼을 쳐다봅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요.





 봄은 봄인가 봅니다. 거리마다 꽃이 피었고 가끔 꽃향기도 따라옵니다. 그중에 흐드러지게 핀 꽃 하나가 눈에 띕니다. 주변은 아직 망울인데, 무리 중에 먼저 핀 꽃 하나입니다. 당신도 역시 그 앞에 멈추어 서서 바라봅니다. 한참이고 그 꽃을 바라보다가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습니다.


예뻐서 꺾고 싶니

저기 앞 꽃집에서 이미 꺾인 꽃들을 사. 날 꺾지는 마.


다가가던 손은 그만 멈춥니다. 나는 놀라 도망갑니다. 엉겁결에 당신도 따라옵니다. 당신 의외로 잘 뛰는군요. 옛날에 운동을 했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숨을 몰아내쉽니다. 엉겁결에 따라온 당신은 음절과 음절 사이에 긴 호흡 두고서 내게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    왜 뛴 거예요?




 우리는 걷고 걸어 사람 하나 없는 서점을 발견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 누군가 나가야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구조. 요즘 온갖 감성이 도배되어 있는 서점들과는 다르게 입구가 세련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꽤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도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는 그런 광경이 생경하고 재밌어 그만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래도 좁은 곳치고는 없어도 될 것은 없고, 있을 것은 다 있는 그런 서점. 사실 그 넓은 서점에 가더라도 우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책장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발만 아픈데,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운, 시-수필의 책장.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가득 채운 소풍날의 도시락 같습니다. 주인은 손님이 와도 온 줄 모르고 독서삼매경입니다. 주인이 우리를 날파리보다도 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제 책장처럼 편하게 읽고 가라는 너른 마음일까요. 우리는 이 책 저 책 만졌다가 놓았다가  당신은 무슨 책을 보는지 당신도 내가 무슨 책을 보는지 서로 기웃기웃하다가 마음이 통했는지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책 선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책을 사려고 주인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또 그런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말없이 파리채 같은 거로 어느 곳을 탁탁 칩니다. 그곳 골판지에는 명필체로 '책 뒷면에 적힌 금액을 계좌로 송금하시오. 계좌주소 신한 5861-...'  손님이 와도 거들떠보지 않던 주인은 입금 알림음이 오자마자 돋보기 같은 안경을 쓰고서 재빨리 확인을 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숨죽여 웃습니다.


나는 데미안 당신은 식물도감에세이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책이었어! 당신도 한번 읽어볼래?

하는 별로 멋있지 않은 선물.

당신은 그저 내가 식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골랐다고

당신의 그런 마음이 순수해서 좋습니다.




 밝은 날씨는 스러지고 새소리도 그만 멈추고 취기도 모두 사라져 버린 밤. 우리는 이대로 보내기에 아쉬웠던 걸까. 그럴 때는 술만 한게 없지요. 알코올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는 아직도 담배를 몰래 펴도 되는 그런 어느 허름한 전통주점집으로 들어갑니다.


주인이 먼저 취해있어서 그게 그렇게 반갑고 좋습니다.

기대도 않던 안주는 얼마나 맛있던지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또 얼마나 좋던지

갑자기 노래를 부르던 옆 테이블은 얼마나 정겹던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그게 그렇게 좋습니다.


 많이도 취했나 봅니다. 그럴 수 없는걸 알면서도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말해버립니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정작 당신과는 헤어지기 싫습니다. 우리는 걷고 또 걷다가  낮에 보았던 그 돌담길 모퉁이에 다시 옵니다.














아까만 해도

그 나무는

이제 막 봄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는데,

날이 끝날 무렵 이제는 마른 가지만 보이었습니다.

당신도 이제 그곳에 없었습니다.

나의 손아귀 가장 치우친 중앙에 그 꽃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예뻐서 꽃을 꺾고 싶니라고 말한 것은 꽃이 아니라 당신이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그 꽃을 꺾은 죄로

날씨는 봄인데, 나는 홀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봄이었습니다.

당신의 하루를 빌린 그날은.


잠시나마 따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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