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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랑무 Jun 06. 2024

내 낡은 서랍에 부쳐

북적대는 시장엔 사람 냄새가 

마트도 없고 배달도 없어서 냄비 들고 시장에 달려가던 어린 날이 있다. 흔한 비닐도 없었지 싶다. 어물전 냄새 질퍽한 길 끝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두부공장이 있었고, 국수 뽑는 국수공장이 있었다. 뜨거운 김을 한 번에 하늘로 올리고 나서야 손님에게 두부를 팔았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선반과 뜨거운 두부를 식히느라 틀어놓은 물을 기웃대며 구경하다 보면 내 차례가 온다. 몇 모? 친절할 것도 없다. 두부 아니고요, 아부라게요. 그게 뭔지 모르지만 사 오라고 한 대로 읊는다. 세모 노릇하게 튀겨진 모양을 두어 장 종이에 싸서 건넨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그걸 들고 나오며 국숫집을 본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내려오는 조각 햇빛에 쳐놓은 차양처럼 챠르르, 국수가 뽀얗게 마르고 있다. 눈이 부시다.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유부(유부, 일본말) 몇 장 쥐고 길을 오른다. 싸르락 널린 국수 백만 가닥 흘려보며 오른다. 추운 날엔 두부 넣은 얼큰한 찌개나 기름 맛이 절반인 유부랑 감자 넣은 맑은 국. 유부는 맛이 따로 있지 않았고, 국물맛 흠뻑 젖은 맛이라면 딱 맞다. 먹을 게 다양하지 않던 때는 기름 맛이 호사다. 간혹 채를 썰어 잡채에 고기 대신 넣기도 했다. 집에 제사가 있는 날은 두부와 유부는 필수였다.     


지도에도 없을 법한 어지러운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내달리던 어린 날들은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스승이었다. 붉고 하얀 깃발 올려 점을 치는 점집도, 언제부터 내림했는지 모르지만 동네에서 없어선 안 될 침바치(침쟁이)도, 붉은 선지 비린내 국대접으로 듬뿍 퍼주는 사람 좋은 박 씨 아저씨도, 탕탕 닭을 치는 아줌마도 푸르게 푸르게 하루를 열었다. 저마다의 삶으로 북적대는 시장엔 사람냄새가 났다. 어제는 마수가 좋았느니, 오늘은 마수걸이도 못했느니 하는 말은 커서야 뜻을 이해했다. 되도록 아침에는 남의 가지런한 물건을 쓸데없이 휘젓지 않고, 혹시라도 그랬으면 꼭 산다, 는 뜻.      


낡은 서랍을 연다. 시절과 계절, 불안과 슬픔, 외로움과 연민, 사람과 물건들이 개어져 있는. 여닫을 때마다 삐걱대며 크고 작은 사연들이 끌려 나온다. 시절을 뒤돌거나 계절을 지날 때, 불안의 언덕을 넘을 때마다 서랍은 몸살을 앓는다. 어쩌다는 서둘러 닫느라 얽히고 흩어지기도 했을 거다. ‘우리가 보는 물질은 그 자체로 실제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형상의 결과물일 뿐… 때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김상욱의 말을 떠올리며 서랍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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