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인정이라고?

나와 당신의 그림자

by 달랑무


집단문화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양식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 self에서 자아 ego와 그림자 shadow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 분리작업이 어린이들에게 너무 빨리 진행되지 않아야 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이런 분리가 일어나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문명화과정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에덴동산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칼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다. 흔히 우리는 착하고 바르다는 good말과 온전한 혹은 전일적 whole이라는 말을 혼동한다. 마치 일생을 통해 선을 행하고 성인의 자질을 계발하면 우리 안이 빛으로 가득 채워져서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심층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면 밝힐수록 어두움 또한 확대된다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전일적이란 표현도 빛과 어두움 둘 다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 존슨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지금도 종종 듣는다. 올가미 같아 싫다. 착하다는 말을 하면 나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어쩌면 영영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착하구나, 하면 나는 아마 올가미를 풀 마음조차 포기할지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어한 일인데. 나는 아직도 나를 돌보는 게 서툴다.


젊어서 혼자된 시어머니는 자식 일곱과 시조카 둘을 거둬 어려운 살림을 이었다. 지금 같으면 줄행랑이라도 놓았을 형편을 평생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니 그간 하지 못했던 말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믿어 안 했던 것이었음을 알았다. 힘드네, 어쩌네 하는 씨알도 안 먹힐 말로 저 시든 가슴팍에 돌멩이를 더 얹어선 안될 것이야. 막상 곁에 안 계시니 하고 싶은 말이 가득인데 못한다. 지금쯤은 착하지 않은 말을 해도 될 만큼 살았으니 이해하고 들으시라 하고도 싶은데.


한 번씩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무거운 짐 지고 짠 바람 앞세워 질벅거리고, 피할 데 없이 뜨거운 해 아래 밭을 갈던 어머니가. 마음만 있었으면 다른 삶을 찾아 그때를 뚝딱 접어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어머니의 발목을 잡았던 걸까. 당신의 선택을 살다 말없이 가신 이가 뒤늦게 그립고 아프다.


"저것들 나 없으면 어쩌나…." 다른 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은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움에 닿아 본 사람이다. 착하다는 말은 어렵다. 다만 너무나 작아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은 자신을 내세우고 싶지 않아 그랬을지 모르는 일인데. 나를 내버려 둔 채 남의 기분만 살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착하면 좋은 사람, 착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는 공식을 제발 달나라로 보낼 일이다. 희생을 강제하는, 규율적 억압을 필요로 하는 환경과 사람과 시대는 멀리 가라.


때로 자신의 이기를 접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바른 것의 시비를 떠난 사람들이다. 나와 다른 이를 긍정하고 보살피는 인정을 내는 사람들이다. 인정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고, 대가 없는 마음이다. 가끔, 요즘 인정이 각박하다거나 욕심을 내며 사는 것이 누구나의 인정 아니겠느냐, 하는 말을 듣는다. 너는 나에게 인정을 베풀었으면 좋겠고, 부엉이 같은 욕심은 다들 있는 거 아니겠냐는 말. 인정의 잣대가 이렇게 다르다. 인정은 사람으로 살려는 마음이라고 믿는다. 늘 착하게 살겠다 장담은 못하겠다만 한 번씩 따듯한 마음으로 살 수는 있게 여미며 살 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