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키는 소리는 결국 내 心思
평생 침묵의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라디오, 텔레비전, 아이팟, 진공청소기 또는 아이폰과 컴퓨터가 끊임없이 다양한 소리를 뱉어낸다. (…)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우리를 치유하는 삶의 소리(귀뚜라미 합창, 짹짹거리는 새소리,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 혹은 나뭇잎 사이로 융융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하루 쓰기 공부> / 브라이언 로빈슨 / 유유
여름의 복판이 시끄럽다. 매미는 밤낮없이 목 놓아 짝을 부르고 , 사이로 고즈넉한 귀뚜리 소리, 가끔 뒷산 소쩍새 소리가 달밤을 채운다. 잠 안 오는 밤, 스멀스멀 기어드는 생각의 꼬리를 이제 그만 자르라는 듯 적당한 추임새로. 사춘기 때는 자연의 소리에 마음을 뺏긴다는 건 당치도 않았다. 음악을 들으며 공부했고, 라디오 음악방송에 엽서도 보냈다. 사연이 소개되었던 날엔 뭐나 된 것처럼 우쭐거렸고. 공부가 아니라면 더 좋았을, 해야 하는 게 공부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공부를 중화할 거라면 뭐든지에 귀를 세웠다. 그러고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라디오가 자라던 자리를 차지한 팟캐스트, 유튜브 방송은 요즘만 같다면 영원히 시들지 않을 모양새다. 주제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고, 몇 가지만 검색해도 비슷한 주제의 사연들을 알아서 골라주는 똑똑이들은 늙지도 않을 거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차고 넘치는 흥미로운 얘기들에 오늘도 나는 '밤을 잊은 그대'가 된다. 이걸 귀호강이라고 해야 할까.
소리하면 떠오르는 하나. 학창 시절 존재감 갑은 독서실이었다. 시험 때마다 밤을 새운답시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공부는 뒷전이고, 어떤 화제 인가로 소곤대며 낄낄대던 밤을 몰아낸 주인공, 독서실. 독서실이 생기고 친구들은 하나둘 독서실로 향했다. 친구가 간 곳엔 어김없이 또래 친구들이 꼬인다. 한 달씩 미리 돈을 낸 친구들은 제일 구석 자리나 안쪽 자리의 단기임대 주인이 되고, 나머지 자리는 뜨내기 공부 손님이 채운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운다고 하면 친구 집에서 밤을 새울 때보다 더 공신력이 있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당당히 독서실비 달라고 손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숨 막히는 고요를 뚫고 의자를 뺀다.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스쾃 자세로 조용히 의자를 당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태도의 친구들 등장한다. 자리마다 있는 작은 형광등 필라멘트 떨리는 소리나 책 넘기는 소리, 까만 볼펜으로 공책이 파이게 둥글리면서 새카맣게 외우는 소리조차 소음일 때 친구와 나누는 소곤거림은 사탕을 몰래 까먹는 것처럼 티가 났다. 소리를 쫓아온 '총무'의 퇴장명령은 가차 없어서 몇 번 걸리면 독서실 출입금지였다. 두어 번 당했나ㅎ.. 동네에 몇 없는 독서실에서 누구는 간혹 연애도 했다. 시험을 앞둔 주간에는 밤샘한다고 와선 가방만 놓고 사라지는 일도 있었으므로 독서실은 의지의 시험대였다. 공부할 결심의 기백 결연히 왔다가 독서실 '사연'에 발목 잡혀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소리의 끌림이 낭낭하던 사춘기를 제대로 겪은 이일 터다.
소리하면 떠오르는 둘. 고2 여름방학에 고3을 준비한답시고 책이랑 옷가지 몇 개 싸들고 절로 들어간 적이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일주일을 못 버텼다. 이불 한 채와 방석, 앉은뱅이책상 외에 방을 채우는 것은 없다. 새벽 네 시에 아침 예불이 있고 보니 공양이 일찍 시작되고 끝난다. 아침을 깨우는 종을 치고 도량을 도는 스님들의 염불 소리를 못 들은 척 누워 있긴 쉽지 않다. 일찍 일어난 하루는 길었고, 시간 마다를 채우는 건 빈 소리. 새소리 유난을 가슴 깊이 들었던 것도 같고. 지저귀는 새들이 시끄럽다기보다 고요를 더욱 부채질한다고 느꼈다. 밤에는 그만 귀 먼 사람이 되어 사방을 떠도는 것 같았다. 소리가 없으니 외려 잡생각이 더 나 온통 시끄러웠다.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그때 읽었다면 '밤을 잊은 나, 그대'는 할 말이 참 많았을 텐데... 나는 그랬으면서 하늘 보고 조용히 누워있던 고3딸에게 "너 지금 뭐 해?" "하늘 봐." "하늘?? 지금이 그럴 때야!" 소리를 질렀다. 고3이 조용히 하늘을 보고만 있어도 심기가 불편했던 고3의 엄마는 어느새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딸의 고독은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딸이랑 이런저런 얘길 하며 걷는 밤길. "와, 오지게 습하구만." 장마를 품은 여름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물이 배어난다. 말끝에도 물이 달린다. 계절을 나누며 걷는 길은 다정하다. 옛날이야기로 여름을 물들이던 어린 날을 함께 했고, 억울한 누명이나마 시간이 벗겨준 날들을 함께 했다. 혼자를 잘 견디던 딸이 아픈 날도 있고, 문득문득 잊히지 않아서 괴로운 날들에 대한 소회도 나눌 만큼 자란 딸과 나누는 오늘 같은 날은 둘이라서 새삼 안심이다. 우리 집엔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는 네 개의 세상이 있지, 라며 우스개 소리도 흘릴 줄 알게 되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거 같아 꾸역꾸역 참아내던 날, 그날 방 안에 차라리 시끄러운 소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 각. 하며 나는 걷는다.) 내가 일으키는 소리, 나를 일으키는 소리는 결국 내 心思지. 심사를 알 리 없는, 심사와 무관한 소리들이, 심지어 자연현상의 소리조차 나를 목적한 무슨 이유가 있었을라고.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고려말 이조년의 시조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잠 못 드는 이유가 한둘이겠는가만, 다정이 병이라도 좋고, 존재의 근원이어도 좋다. 불면의 밤을 라디오로 지새운 날, 친구와 소근대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를 소홀히 한 날, 침묵의 공간을 버리고 나왔던 날, 각자의 날들이 환하다. 아직 이어지기도, 아니기도 한 날 중 어떤 날은 '혼자'를 견디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혼자를 피할 수만 있다면 중요한 걸 잠시 놓치더라도 우선 나의 손을 잡는 것에게 마음을 다했다. 아직도 때때 소음에 가깝기도 한 삶의 소리에 답하며 산다. 마음을 끄는 것에 충실하면 둘째가라도 서럽진 않을 거고, 어쩌면 처음처럼 반가울 날도 간혹 오지 않을까, 아무래도 다정이 병에 가까운 나, F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