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손끝에 낯선 박스 하나

큐리텔 케이머스

by 달구비

발등을 조여 오는 운동화 때문에 엄지발가락이 욱신거렸다. 결국 발톱이 빠질 것처럼 너덜거리자, 할머니와 함께 운동화 전부를 수레에 실어 고물상에 내다 팔았다. 고물상에서 받은 돈으로 오랜만에 삼겹살을 먹었다. 그러나 입가의 기름끼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엔 천장에 정수리를 찧어 혹이 생겼다. 결국 할머니는 내 뇌세포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유난히 고추를 많이 심었다. 그 때문에 마당은 늘 시뻘건 고추로 아수라장이었다. 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고추를 말리기 위한 커다란 별채를 지었고, 할머니는 그 후끈거리는 방에 훌쩍 커버린 손녀를 밀어 넣었다. 갈 곳 잃은 고추들은, 다시 마당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별채는 위 아래로 엄청 컸다. 덕분에 오랜만에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었다. 원래 내방이었던 문을 여는 드르륵 소리가 별채에서 들리면, 곧 "밥 먹으러 오라."는 할머니의 고함이 따라왔다. 그건 나를 깨워주는 알람이었다.


중학생이 된 뒤로, 늘어난 수업시간과 교실에서 보내는 일상은 묘한 해방감이 들어 개운했다. 교복을 살 때 어색하게 눈을 맞췄던 경은이 와도 금세 친해졌고 유빈이, 현빈이라는 친구들과는 동방신기 빠순이를 자처하며 베프가 되었다. 우리 넷은 화장실까지 붙어 다닐 정도로 시끄러운 여중생이었다.


"이번에 산 거야. 가로로 돌릴 수도 있고, DMB도 된대."


점심시간을 울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급식실로 뛰어갔다. 제일 먼저 급식을 받고 둘러앉은 식탁 위로, 경은이가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우와. 이거 가로본능 폰 아니야? 열라 캡이다."

"맞아. 안테나 뽑으면 DMB로 티브이도 볼 수 있대."

"지금도 나와?"

"한 번도 안 켜봤는데, 기다리삼."


경은이가 새로 산 휴대폰은 가로로 화면이 돌아가는 그 당시 엄청난 인기였던 가로본능 휴대폰이었다. 안테나를 뽑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TV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돌아가면서 휴대폰을 주물렀다. 새 휴대폰 냄새는 강렬하게 인중 끝에 남았다. 며칠 뒤 현빈이와 유빈이에게도 새 휴대폰이 생겼고, 우리는 빈 체육관에 모여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깔깔거렸다.


"할머니. 나 가로본능 휴대폰 사줘."


어김없이 친구들 휴대폰에 내 흔적을 남기고 온 저녁. 그날따라 집에서도 아른거리는 휴대폰 생각에, 둘러앉은 밥상 위로 목구멍 끝에 걸린 말이 툭 올라왔다.


"그게 뭐이니?"

"휴대폰. 전화기 있잖아. 한 50만 원이면 살 수 있대."

"아이고... 그 돈이 워딨어."

"우리 반에 나 빼고 다 있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난처한 듯 목을 큼큼 가다 듬으며 자리를 털고 나갔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할머니 손 끝으로 흙이 껴서 검게 변한 손톱이 보였다. 나는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갖고 싶다는 열망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한번 시작한 휴대폰 이야기는 점점 부풀어, 내 의지로 제어가 안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맨날 나만 없잖아. 교복도 휴대폰도."

"할미가 돈이 어디가 있어."

"왜 없어? 맨날 농사짓잖아."

"야가 와이리 훌래볶노 오늘따라."

"엄마도, 아빠도 없고. 난 아무것도 없잖아. 구질구질하게. 할머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갑자기 시작된 휴대폰 이야기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다. 할머니가 제일 애달파하는 이야기가 엄마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에 더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할머니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기 위해 쿵쾅거리며 걸었다. 콧김을 내뿜으며 부엌문을 열자 상기된 표정의 할아버지가 보였고, 바위 같던 손바닥이 공중에서 잠깐 멈추더니 곧 내 뺨으로 향했다.


"시상에. 와 이라요 영감!"

"어떻게 네 할미한테 그런 소릴 해?"


순식간에 밥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황소처럼 파리채를 찾겠다며 씩씩거리고 있었고, 나는 할머니 등 뒤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었다.


"재영이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이. 영감, 이제 됐시야."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붙들고 있는 사이에 맨발로 펄쩍펄쩍 뛰며 별채로 달렸다. 눈물은 벌겋게 부어오른 뺨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닥을 다 적실정도로 울었다. 퉁퉁 부은 뺨보다,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처음 본 화가 난 눈빛이 가슴에 화살이 꽂힌 듯 아팠다. 이불속에서 헐떡 거리며 우는데 문 밖에 질질끄는 슬리퍼 소리가 났다.


"재영아, 좀 괜찮나?"


문 너머로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창문을 살짝 열고 주위를 살폈다.


"할아버지는?"

"창고에."


안도하며 굳게 잠근 내 방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품에 넣어둔 날계란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부어오른 내 뺨에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차가운 날계란은 금세 뜨끈뜨끈 해졌다.


"아이고. 내 새끼... 미안하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주무르며 계속 흐느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내가 불쌍하다며, 나는 할머니한테 미안하다며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맞댔다. 짙게 깔린 어둠 위를 비추던 형광등 불빛은 쉽사리 꺼지지 못했고, 그날 밤공기는 유난히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을 들썩이던 어깨 위로 어느새 새벽빛이 번져오고 있었다. 새벽벌레의 우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언제 잠든 건지 기억도 안 나는데, 창문틈으로는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눈가에 눌어붙은 눈곱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뿔싸. 하필 놀토였다. 할아버지를 마주칠 생각에 아찔했다. 아침을 먹으라고 소리치는 할머니 말을 못 들은 척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팅팅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잠에 들었다.


"재영아."


나를 부르는 굵직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앉아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잠든건지 시계는 오후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할아버지 손에 후시딘이 들려있었고, 그 옆으로는 종이가방이 놓여있었다.


"약 발라야 흉 안 생긴다."


비몽사몽 한 얼굴 위로 할아버지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닿았다. 내 볼에 후시딘을 바르는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점점 빨개졌다. 목석같던 할아버지가 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이게 그거라?"


할아버지가 옆에 있던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그 안으로 작은 박스가 들어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뜯어보니, 작은 보라색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경은이 휴대폰에서 맡았던 그 새 휴대폰 냄새도 났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할아버지와 휴대폰만 번갈아 쳐다봤다.


"가로 그거는 못 사줬어도, 이거 괜찮나? 학상들이 이거도 쓴다 하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웅얼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휴대폰 가게를 쭈뼛거리며 찾아갔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했다. 아마 오토바이를 타고 속초까지 달렸을 것이다. 최신 유행하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가, 보급형 휴대폰으로 타협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비록 친구들이 샀던 인기 있던 폰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휴대폰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반짝이고 비싼 휴대폰이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