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타우로스가 달려간다.
남편 우주가 버건디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입구가 좁은 샴페인 잔에 비하면 항아리 같은 깊고 넓은 주둥이가 투박하다.
"그거 레드 와인잔 아니야?"
"응. 나도 그렇게 배워서 쓰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항상 버건디 잔을 가지고 다니면서 드시더라고. 따라 해 보니까 나도 맛이랑 향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아서."
느낌을 따르는 행동.
나에게는 낯선 행동지침이다.
오늘의 와인 비스트로따쥬의 노란 호박꽃 향이 공간을 채운다.
"맞다. 내가 지난 환자 발표 시간에 있었던 일 이야기했었나?"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발이 나를 살렸어."
나는 한껏 달떠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내 차례였던 환자 프레젠테이션 시간.
의학드라마에서 이 장면은 보통 교수가 레지던트들은 "까기 위해 까는" 장면으로 많이 묘사되지만, 사실 이 시간은 의료인으로서 스스로가 환자에 대해 얼마나 질문을 하고 답해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보통 우리 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답해본다.
- 환자가 이 질환을 언제부터 앓았고 어떻게 치료받았는지, 이번에는 어떤 증상이 있어서 입원하였고 어떻게 치료받아 퇴원을 준비하고 있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와 집에 가면 누가 환자를 돌보는지. 환자가 임종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는지.
"달하 선생님. 그런데 이 환자는 튜브를 통해 식사를 하는데, 왜 이렇게 자꾸 흡인성 폐렴이 생기죠?
"이 환자 46세네요. 한 번씩 폐렴 올 때마다 컨디션 확확 나빠지고...... 폐렴은 이분 삶의 질이랑 아주 밀접한 것 같은대요."
중요한 질문에 중요한 포인트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환자에 대해 좀 더 고민했어야지.'
활시위가 스스로에게 향하려 팽팽해진다.
입이 알았는지 궁색한 이야기를 해볼까 뻐끔대려고 한다.
그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양쪽 발로 바닥을 꾹 눌렀다.
- 지금 내 발의 느낌이 어떻지.
발 감각으로 순간 주의를 옮기자 입이 뻐끔거림을 멈췄다.
"그 부분은 제가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정신이 돌아왔다.
"네. 한번 다시 살펴봐 주세요."
"살았네."
비스트로따쥬를 한잔 더 따르며 우주가 말했다.
"응, 살았지."
"그런데 어떻게 발을 땅에 디뎠는데, 그렇게 된 거지?
"모르겠어, 순간 발 감각으로 주의를 옮겼더니 생각이 일단 멈추더라고."
순간을 모면했다는 일차적인 안도감과 팽팽했던 활시위가 방향을 잃고 풀려버리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대답하지 못했다는 당혹감은 사라지고 진짜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마음에게 말을 걸어 내가 여기 있어라고 알려 주었나 보다.
켄 윌버는 책 <무경계>에서 이것을 켄타우로스(kentaurus)라고 표현한다.
켄타우로스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전설적인 동물로서, 몸과 마음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보여준다. (중략) 육체와 떨어져 나와 육체를 조종하는 정신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관리하는 심신의 통일체이다.
아마도 나는 그때 일시적으로나마 켄타우로스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당혹감과 자책감이 사라진 그 순간을, 다시 환자에 대해 질문해 볼 용기가 채웠다.
그 용기로 환자를 만나러 가고 다시 질문이 이어지면, 나와 그에게는 마법의 순간들이 펼쳐질 것이다.
누구는 의사가 환자를 살린다고 하지만 사실 그 반대임을 알아버린 켄타우로스가 땅을 딛고 힘차게 달려간다. 서로가 서로를 살린다.
켄타우로스가 달려간다.
남편 우주는 와인 수업 WSET level 2를, 저는 명상 수업 MBCT-L을 듣고 있습니다.
서로가 모르는 분야인지라 나도 너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태를 갖춰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도 알게 된다면.
이야기들은 결국 스스로 교차점을 찾아낼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WSET : Wine and Spirit Education Trust
MBCT-L : Mindfulness Based Cognitive Therapy for Life
오늘의 와인
비스트로따쥬
오늘의 이야기 속 명상
3단계 호흡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