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모임을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와인 라인업이 좋아서 갔는데, 다들 명함 돌리고 하더라고. 자기소개도 한 마디씩 해야 돼서 나는 그냥 주부라고 말했어."
"아 그랬구나. 모임에 온 분들 중에 제일 유니크한 대답이었겠다."
"아마 그랬을 것 같아."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의 웃음이 터진다.
결혼 초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들을 소개해야 할 일이 자주 있었을 무렵, 우리를 뭐라고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 나와 남편은 꽤 골몰했다. 아주 진실되게 대답할지 아니면 거짓은 아니지만 그럴듯하게 대답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나는 보통 의사로 소개되었지만 그 획일적인 대답이 불만이었고 남편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본인이 하는 일을 다른 이들이 잘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결국 우리는 적당히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상대를 배려하며 자기소개 멘트를 찾는데 드는 에너지를 막아보려는 적정한 타협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 부모님에게도 최서방은 "컴퓨터를 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어요."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 딸이 비혼 주의자라고 생각하셨기에 누구라도 괜찮다고 말해 온 부모님도 첫 질문도 이것이었다.
뭐 하는 사람이니?
" 컴퓨터 하는 사람이에요."
"의사는 아니구나."
"네."
2015년부터 암호화폐 관련 일을 하던 남편은 이후 주위에도 "컴퓨터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되었다.
당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고 누군가는 게임머니로 생각했기에, 그에 대해 너무 자세한 소개는 상대방에겐 혼란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단어로 상대가 소개되길 원했다. 그것도 가능한 명사형으로. 또한 타인의 직업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서로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의 가장자리를 내어놓는 것은 그와 나 둘이었다. 나는 남편을 만나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생태계를 공부하고 백서를 읽었다. 알트코인들의 ICO에 참여해보고 차트 보는 법을 익혔다. 의료인이 아닌 남편은 내가 늘어놓는 어렵고도 슬픈 환자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2년여를 만나고 나는 남편에게 청혼했고 남편은 흔쾌히 승낙했다.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우리는 각자가 즐거워하는 일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돕고 있다.
남편은 집안일을 하고 아가를 돌보며 와인을 공부한다.
나는 말기 환자들을 돌보고 환자들의 집을 방문하며 입원환자들만 봤을 때와는 다른 보람을 느낀다.
불과 몇 년 사이 세상은 변하고 있고, 우리도 변해가며 점점 자기소개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우리는 고민 없이 저는 재택의료를 하는 의사입니다라고 말하며 남편은 주부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함께 사는 수년간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으며 무엇이 되어가고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봐 주고 있는 친절한 관찰자인가 보다.
며칠 전 남편과 둘째에 대해 우리는 그를 너무나 원하지만 어떤 마음자세로 그를 맞이해야 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말미에 나중에 누군가 우리의 아가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가 "나는 그냥 내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너는 그냥 단지 네가 되면 된단다라고 조용히 그를 응원하고 싶다고.
"오 그거 멋있네, 그리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지."
남편이 말했다.
"응 그치."
서로가 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응원하는 친절한 관찰자가 되길.
때론 머쓱하고 싱겁고 미숙하겠지만 모두에게 그렇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