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May 09. 2024

없어요, 가슴 뛰는 그런 일.

가슴 떨리는 일을 찾지 못한 당신에게

* 매거진으로 발행했던 글을 연재 흐름에 맞추어 두번 째 글로 재 발행합니다. 이미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스무 살. 문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생활이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고등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마음은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또 아버지가 대동되었지요. 생에 두 번,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던 순간입니다. 요즘에도 관심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시작하고 싶을 때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꽤 오래 그럴 것 같아요.


그 실수는 늘 동아리를 하면서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저에게 동아리라는 세계는 별천지였어요. 저는 영어 읽기 동아리와 합기도 동아리를 해보기로 결정했고, 과 내 학생회도 하겠다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동아리 하나만 열심히 해도 벅차잖아요. 학과 강의를 듣고 나머지 시간 동안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좋아하는 언니나 오빠가 있기라도 한다면, 동아리 생활에 올인! 대학생활을 떠올리면 동아리 활동만 생각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는 영어 동아리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멋진 오빠들이 너무 많았어요! 나도 그들과 같은 관심사를 가졌다고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영어동아리에 열의를 내다보니 합기도와 학생회는 자연스럽게 뒷전이 되었습니다. 학생회와 합기도도 어찌나 일정이 빠듯하던지요. 그러다 보니 영어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날과 다른 동아리 일정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그만두어야겠는데 이걸 어쩌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되자 선배들과 안면도 텄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내 발로 들어가 놓고 100일 만에 열정이 식은 사람이 되기 싫었습니다. 결정이 가벼운 사람이라는 인상도 남기기 싫었고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는 괜찮았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가 되는 것은 치욕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아빠에게로 갔습니다. 고등학생 때처럼 말이죠.


"아빠, 합기도 동아리 회장에게 전화 좀 해 주세요. 아빠가 동아리 활동 금지했다고."


아빠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습니다. 어떤 충고나 조언도 하지 않으셨고 말없이 합기도 선배 전화번호를 받아가셨어요. 그리고 2년 전 고등학생 때, 광고동아리 선배에게 했던 것처럼 전화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도 그랬습니다. 고등학생 때 밴드부와 광고 동아리 두 개를 동시에 하던 저는 어느 순간부터 밴드부에서 드럼만 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려면 광고동아리 선배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했죠. 그래서 그때도 아빠에게 요청했어요. 아빠는 광고 동아리 회장에게 전화 했습니다.


"OO고등학교 광고부 아무개지요? 저는 달하 아빠입니다. 우리 애가 요즘 성적도 떨어지고 매일 늦게 들어와요. 동아리 활동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애 엄마와 상의했고 모임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광고 동아리 모임 시간. 저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고 선배를 만나러 가서는 '부모님의 뜻 때문에 하지 못해요'라는 표정으로 앉아있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선배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학에서 만난 합기도 선배는 달랐어요. 아빠가 전화를 하고 이틀쯤 뒤 그는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저에게 동아리 활동이 어떤 지부터 몇 가지를 물었죠.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달하야, 그런데 그게 아버지가 전화를 해야 했던 일일까? 그전에 나한테 먼저 와서 이야기하고 그만둔다고 얘기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도 당황스러웠고 무엇보다 이제 우리는 대학생이잖아. 부모님이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나이기도 하고."


그의 말처럼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결정했던 것을 정중하게 철회하는 방법을 모른 채 몸만 커버린 대학생이요.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아빠를 탓한 적은 없습니다. 부모님은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제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사진: Unsplash의Justin Luebke


나는 그때 왜, 그만둔다고 스스로 말하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소속된 조직을 너무 크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해 첫 발을 들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시작했기에 그들과 함께 하는 세계가 내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부의 세계를 확대경으로 보고 있었나봅니다. 큰 세계는 저를 압도했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스스로가 나서서 말할 시기를 놓쳐버리게 된 것이지요.


둘째, 내 선택이 틀린 것 같은 느낌이 싫었습니다.  선택했던 것을 취소하는 행위가 실패감을 주었어요. 자신이 '틀린 선택'을 하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같았거든요. 처음부터 바른 선택은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결과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있던 것뿐이었는데 말이지요. 'A라는 선택이 옳았어'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A를 위해 B를 포기하는 과정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을 거고요. 생각해 보면 현재의 내가 '영어동아리를 한 건 좋은 선택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합기도와 학생회를 포기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는 그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몰랐습니다.


셋째, 내가 잘 유지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취소해야할 것에 큰 의미를 두었어요.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너는 왜 시작한 걸 진득하게 하지 못하니’ 같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자주 들었어요. 그 말에는 진한 것은 좋은 것, 그렇지 못하면 나쁜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요. 나쁜 선택을 한 못난 사람이 되기 싫었습니다. 사실 저는 한 가지는 계속하고 잘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에요.


이런 생각들이 모여 '내가 그만두겠다'해야할 것을 아빠에게 요청하게 되었고, 댓가로 스스로가 비겁하단 느낌이 주어졌습니다. 그 느낌이 아직 남아있고 거기에 합기도 선배의 이야기가 이어져, 요즘의 저는 '그만둠'이 필요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일시적으로 발을 들였던 곳이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그만두려는 이것도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포기한 것보다 지금 유지하는 그 한 가지에 집중하려고 해요. 

사진: Unsplash의Jacqueline Munguía

이런 선택의 과정에서 가슴 떨리는 무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가슴 떨리게 원하는 일'이 먼저 있었을까 싶어요. 그저 선택과 집중을 반복하며 '살아남은 것'이 결국은 내가 '원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우리는 무언가에 관심이 있었을 뿐, 그것을 시작하고 계속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것, 환경이 나쁘고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가득한데도 내가 하고 있는 것, 어떤 이유로든 나를 그것으로 부르게 하는 것. 그런 것들이 결국 '나와 세상이 원하던 것'이라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로 결정을 주고 받는 과정을 겪으며 말이지요. 앞에서 말한 이유로 책상에 앉아 가슴 뛰는 것을 종이에 써보며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는 일'은 저에겐 불가능하게만 보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포기하며 과정 속에 몸을 담가보는 일이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입니다.


저는 세상에게 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그 ‘시그널’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원망했었습니다. 이제 멈추기로 했어요. 세상은 우리 모두에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공평하게 주었더라고요. 이제 선택하고 포기하며 그 '관심사'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실행해 보았다가 포기할 때, "나는 시작만 거창하고 끝은 미미해"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양한 것을 해보고 싶은 열정은 그대로 살리되, 해보고 아닌 것을 대하는 태도를 계속 정비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말이지요. 처음에 타올랐던 열정이 뭉근히 이어지는 방식은 내가 다 알 수 없더라고요. 결국 내가 한 선택이 수많은 결정과 맞딱뜨려야 할 때, 매 순간 지혜롭길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애초에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선택은 곧 좋은 선택이 될 기회이자 싹이라고 생각해요. 그 중 마지막까지 남은 하나를 후에 '그것이 나와 세상이 서로에게 원했었다' 기록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제 글은 이미 뚜렷한 목표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 한가지'를 향해 가시는 분들에겐 도움이 (덜)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길을 가시다 헤매는 시기가 왔을 때, 제 글을 기억해주시다면 더할 나위없이 고맙겠습니다.


어떤 일에 관심 갖기 시작한 분들이나, 관심사가 발현될 '선택'을 고민하신 분들에게 일말의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나만없는,  ‘간절히’ 원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