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되겠다'고.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엄마의 질문에 어린 제가 대답합니다.
"미스코리아요."
제가 꽤 커서까지 공중파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방송했습니다. TV에서 본 그녀들은 키도 크고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엄마는 또래보다 키가 작고 통통하게 자라는 저를 보고 말합니다.
"너는 안 되겠는데."
어린이의 꿈은 그렇게 사라집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죠.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질문하고는 곧 '너는 안 되겠다' 말하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저희 집처럼 외벌이에 자녀가 셋인 '보통집'에서는 아이의 관심이 곧 돈을 버는 일과 직결되기 바라기 때문이지요. 안타깝게도 '보통집' 아이들의 꿈은 곧 직업으로 치환되기 쉽습니다. 아이의 관심사가 궁금하지만 꿈을 곧 돈으로 계산해야했기에 부모의 말은 자주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그 영향이었는지 저는 늘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계속 고민이었어요. 나에게 더 잘 맞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다 결국 '애초에 가슴 뛰는 일은 없어!'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에 ‘가슴 뛰는 일’을 검색해 보았어요. 글을 하나 발견했지요. 한 선생님께서 진로지도의 어려움을 토로하셨습니다. 먹고 사는 일로 이어지는 진로를 가이드해야 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 선생님께서도 종이에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을 적고 '가슴이 뛰는지' 살필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지만, 개인적으로 그 방법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이 떠올랐어요.
저희 아이들은 아직 어렸기에 저는 그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묻지만 말아야겠다,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질문이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수년 후에는 저 아닌 누군가에게 그 질문을 듣게 될 것 같더라고요.
아무개야,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질문하시는 분, 정말 시대에 뒤처지셨군요. 뭐가 되긴 뭐가 돼요, 제 자신이 되어야지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유행을 따라 '나 자신이 되겠다' 내뱉다가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가 갑자기 자신이 되는 법이라도 묻는다면 답할 길이 없더군요.
엄마, 그런데 어떻게 나 자신이 되나요?
'나 자신이 된다는 것'에 대해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답이 떠오를 때까지 꽤 오래 질문을 묵혔어요. 그러다 임경선 작가의 책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에서 그녀가 하는 말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인생의 선택이 쌓이면 내가 된다는 문장이요. 수많은 선택들로 비로소 '내가 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 있는 우리들의 '관심'이 더 소중해졌어요. 관심이 곧 선택들의 첫 단추가 될 거란 생각에 말이지요.
그렇게 관심이 이어져 선택이, 그 결과가 곧 '자신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기점이 되면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 하나 있더라고요. 바로 '일' 말이지요. 진정한 독립인간이 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일을 시작해 보기 전에 적성에 맞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 일을 하며 함께 하는 사람들과 환경, 시간 활용의 자율성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곧 그 일이 내 적성에 맞는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쉽겠지요. 그래서 진로를 고민해야 한다면 어떤 일을 할지 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필요하단 생각입니다.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여 나에게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니까요.
사람, 환경, 시간은 결국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들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계속 조율해 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피할 수도 없고 말이지요. 그렇기에 과정을 좀 더 쉽게, 알면서 가기 위해 과정에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삶의 정반합이라고요. 일이 삶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일의 정반합'이라고 하면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정반합은 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느낌이에요. '정'이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반'은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입니다.
사람, 환경, 시간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일을 하면 우리는 순항 하는 느낌, '정'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모든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일을 하는 데는 꽤 괜찮아요.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해야 해서 시간이 자유롭진 않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잘 맞아! 라는 식으로요. 우리는 보통 그런 상태로, 조건들 중 어느 한가지는 괜찮기에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 그러다가 그 조건들이 맞지 않고 삐걱거리는 때가 옵니다.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든 둘이든, 아니면 모두가 맞지 않아 살펴야 하는 순간들이 말이지요. 이때를 '반'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반'은 내가 내린 이전의 결정이 잘못되어 지금이 이렇다고 부정하는 때가 아니라 이 조건들을 점검하는 시기, 조정해나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저의 '반'은 사람과 시간의 어려움으로 다가왔고, 지금이 점검 시기인가보다 생각하며 눈을 껌뻑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뤄집니다)
이렇게 '일의 정과 반'을 무수히 거치며 그 조건들이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할 때 그 상태에서 하는 일이 비로소 가슴 뛰는 일, 내 영혼까지 기뻐하는 일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저는 이 모든 이야기는 가슴 뛰는 일을 찾아 헤매던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저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해요. 다만 거기서 하는 선택들이 너 자신을 이루는 것이기에 네 주위의 사람, 환경, 시간이 곧 '네가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말하고 싶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는 일이면 뭘하든 만족스러울 거라고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최선이라고 말이지요.**
나에게 들으라고 문장을 몇 차례 읽어봅니다. 그럼에도 제가 겪고있는 '반'의 시기는 깜깜하기도 해요.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 모든 과정이 '합'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위안해봅니다.
저는 이렇게 자신이 되어가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 인간,공간,시간, 이 삼간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하영 원장님의 책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에서 힌트를 얻어 일에 적용하였습니다.
** 밑줄 친 이 문장들은 '가슴뛰는 일'을 찾아 헤매던 제가 한 선생님께 메일을 드려 질문했을 때, 그가 저에게 답해준 이야기입니다. 통감하기에 글을 써내려갑니다.
표지 사진: Unsplash의Juan Encal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