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bblysaurus』, Rachel B. & Chris C.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며, 나는 동화작가의 덕질을 시작했다. 그중 첫 번째는, 레이첼 브라이트 (Rachel Bright). 『내 안의 용감한 사자』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된 『The Lion Inside』라는 책의 독일어판을, 단순히 표지가 예뻐 집어 들고는 남편에게 부탁해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림체가 워낙 예뻐서 내용도 안 보고 골랐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더 예쁜 책이었다. 몸집은 작아 다른 동물들에게 무시당하던 생쥐가, 덩치는 크지만 겁이 많은 사자를 만나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읽고는 레이첼의 문체에 마음을 쏙 빼앗겼다.
그러다 런던 출장길, 참새의 방앗간처럼 지나치지 못하고 들린 기차역의 서점에서 『The Wobblysaurus (흔들흔들 공룡)』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자전거를 배우던 이나에게 딱이다 싶어 고른 책이었는데, 읽자마자 내가 더 폭 빠져 매일 저녁 '이 책은 어때'하며 아이들이 다른 책을 고르기 전에 먼저 꺼내 들었다. 자전거 타기 행사에 나가기 위해 연습을 하던 흔들흔들 공룡이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어 다른 공룡들과 함께 즐겁게 자전거를 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나 또래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에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 공룡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좋은 것을 얻는 데는 시간이 걸려. 그리고 우리는 짧은 레이스가 아니라, 그 긴 여정을 함께하는 거야. (All the best things take a while, and we're all on one big journey, not a race.)"
"인생은 말이지, 빨리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야.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는 방법을 찾는 거지. (In life, it's not about how fast we ride the track, but more that when we fall, we find a way to bounce right back.)"
모두 우리가 언젠가는 한 번 들어봤을, 어쩌면 여러 번 지겹게 들어왔을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것의 묘미는, 나에게 필요한 말이, 나에게 필요한 순간에 다가온다는 것. 승진을 앞두고 나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때였다.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그 자리에 맞는지 의심이 들던 차였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고 싶었고, 실패하면 낙오자가 될 것 같아 겁이 났다. 사실 유럽사람들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준비가 되면 자연스레 승진이 될 것이고,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하면 되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 누구도 내게 가르친 적은 없지만, 나는 자연스레 '뛰지 않으면 낙오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인생은 길고, 지쳐있는 지금의 나를 재촉하여 빨리 갈 필요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유럽으로 넘어와 일을 하며 지금까지도 잘 적응하지 못한 것 한 가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어떤 일을 하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할 것 같아 도전하지 않는다거나, 실패했다고 해서 쉽게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입사 인터뷰에서는 성공경험만큼이나 실패경험을 많이 묻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실패에 유연하게 대처하는지가 얼마나 자주 성공을 하며 살아왔는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단지 실패한 사람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 아닌, 실질적인 삶의 교훈으로 생활에 삼고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회복탄력성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조그마한 실수를 해도 마음에 담아두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어떠한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기 위해 완벽하려고 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는 사실을 더 깨닫게 될 뿐이다. 실패가 두렵지 않다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절반은 가볍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읽어왔던 이야기들은 단순한 '자전거 타기 행사'가 아니라, '자전거 대회'를 만들어서 흔들흔들 공룡이 1등을 하는 서사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마도 그런 이야기에서 주고 싶은 교훈은 '뭐든 열심히 하면 너도 잘할 수 있어'였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공룡이 없다. 모든 공룡들이 제각각 본인이 좋아하는 형태의 자전거를, 본인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탄다. 모두가 행복하니 등수 따위는 정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사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 다른 사람의 눈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에 만족하고 산다면,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경쟁 따위는 없고 모두가 매일매일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