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따뜻한 동화의 힘
나는 런던 출장을 좋아한다. 처음 유로스타를 탈 때, '바다 밑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 자체에 신난 나는 문 밖으로 물속 탐험을 하게 될 줄 알고 신났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주 우스운 상상인 걸 알면서도, 그냥 런던 가는 기차를 타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이유 중에는, 유로스타 역인 세인트 판크라스 (St. Pacras) 역 안에 있는 서점이 한몫을 할 것이다. 영어책을 구하기 힘든 벨기에에서, 런던 출장은 아이들의 영어 동화책을 골라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무리 바쁜 출장길이더라도, 가능하면 20분 정도의 시간 여유를 두고 항상 서점을 들렀다.
며칠 집을 떠나 있던 엄마가 돌아와, '짜잔- 깜짝 선물이야.' 하며 책을 내밀면, 아이들은 운다. 장난감이나 달달한 간식일 줄 알고 잔뜩 들떠있다가, 딱딱하고 차가운 책 두 권을 꺼내면, 아이들은 금세 화가 난 얼굴로 날 쏘아본다. 나름 바쁜 시간을 쪼개하며, 고르고 골라 좋은 책을 가져온 건데,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나 또한 속이 상한다. 중간에서 아빠는 '그러게, 책을 왜 또 사 왔어.'라며 은근 한 마디를 얹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은 엄마의 마음인데 그걸 몰라주는 남편에게 심술이나 괜히 화풀이를 한다. 한바탕 감정낭비를 하고 저녁이 되면, 아이들은 새 책을 쫄래쫄래 들고 와 읽어달라고 한다. 다 읽고 나면 '우와, 엄마, 내가 이 책 좋아할 거 어떻게 알았어요?'라며 신나 한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집 식탁 위에는 언제나 책들이 쌓여있었다. 이른 아침 읽어나면, 엄마가 조그마한 스탠드 등을 하나 켜두고 아주 맛있다는 듯, 그 식탁 위에서 책을 읽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 집에 있든, 여행을 가든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책 한 두 권을 두는 버릇이 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나니 점점 책 읽는 빈도가 줄어들어, 어느 날 오래전 사둔 책에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고는 한숨이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일 년에 책 한 줄을 안 읽는 삶이 되었다니. 그런데 불현듯, '아니지, 나 이제 매일매일 책을 읽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 적어도 두세 권의 책을 매일 읽어주고 있으니, 결국 나도 그만큼의 동화책을 매일 읽고 있다는 것 아닌가.
사실 나는 아이들의 책을 고를 때,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좋겠지'라는 생각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이다. 결국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와 그림이라면 아이들이 읽고 싶어 한다고 해도 내가 정성을 다해 읽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들로 가득하다. 어쩌다 좋은 작가를 한 명 찾으면, 아이돌 덕질하듯 그 작가의 책을 모두 다 찾아 읽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나에게는 힐링이 되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업무에 휩싸여 머리를 꽈악 움켜쥐고 있다가, 따뜻한 동화책 한 권을 읽고 나면, 머리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어린 오리가 길을 잃었다가 다시 엄마를 찾아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 아가야, 앞으로는 엄마를 잘 쫓아와야 돼 알았지?'
'네, 엄마. 마음에 잘 새겨둘게요.'
그때 이든이가 말했다.
"엄마, 그런데 마음에 너무 깊이 새기면 아프지 않을까? 뭐든 너무 깊이깊이 새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하필이면 회사에서 쓴소리를 들어 책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회사에서 한 실수들, 모진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한 날에, 이든이가 엄마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맞아, 너무 깊이 새기면 좋지 않지. 가끔은 그냥 가볍게 흘려버려야 하는 것도 있지."
어쩌면 아이들에게만큼이나 어른들에게도 잠자리 동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길지도 무겁지도 않은,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꼭 나한테 필요한 이야기가 있는 잠자리 동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