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 빌어먹을, 번아웃

이 망할 놈이 언제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일까

by 달하달하

나는 6년째 벨기에에 살고 있다. 5년 여 간의 독일 생활 후 벨기에로 넘어왔을 때, 나는 꽤나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첫째 이든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던 나는, 낯선 나라에서 하루 종일 갓 한 살이 된 아이와 집에서만 생활을 했다. 남편 마크도 프랑스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때라 작은 일에도 말다툼이 벌어졌고, 나도 모르게 매일매일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이든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하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나의 우울증은 오히려 더 깊어져만 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잠만 잤던 것 같다. 자도 자도 피곤이 가시지 않았고, 어느샌가 집 밖으로 한 발도 떼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비로소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정신과의사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찾는다고 해도 영어로 상담을 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의사 찾기는 애초에 포기를 했다.


어떻게든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MBA를 골랐다. 오랜만에 마크 부인이나 이든이 엄마가 아닌, 박은지로 살아가면서 조금씩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 싶어 기나긴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독일에서 첫 아이를 낳기 전, Accenture라는 IT 컨설팅 회사에서 다니던 나는 출장이 잦았다. 입덧이 심해 임신 중에도 업무가 쉽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를 두고 출장을 다닐 일이 막막하여 육아휴직 후에는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Boston Consulting Group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우와, 이런 곳에서 나를 왜 찾나 싶을 만큼 우러러보던 회사. 무엇보다도 업무 강도가 살벌하게 높다는 전략 컨설팅. 누가 봐도 3년 여 간의 유아휴직 후 다시 일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지만, 흔치 않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였기에 워킹맘으로의 첫 회사로는 무리일 거라 생각했지만, 6개월만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첨언하자면, 마지막 면접 즈음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입사가 미뤄진 사이 임신을 하게 되어, 결국은 둘째 이나가 9개월이 되었을 때 전장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2024년 1월, 지난 2년 간의 노력이 결실이 되어, 승진을 이뤄냈다. 6개월, 1년만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나였기에, 이 승진은 나에게 돈과 명예 이상의 의미였다. 지치지 않고 달려온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달까.


2024년 9월, 회사에서 매칭해 준 1:1 코치가 나에게 물었다. “음… 당신에게서 몇 가지 번아웃 증상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요?”


2024년 10월, 주치의가 말했다. “지금 이 상태로 일을 꾸역꾸역 해나가는 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만, 저라면 당장 병가부터 내겠어요.”


2024년 11월, 심리상담가와의 첫 상담. “번아웃이군요. 긴 여정이 시작될 거예요. 저와 같이 솔루션을 찾아봅시다.”


나는 아직도 번아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내 코치도, 주치의도, 심리상담 전문가까지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번아웃이라 정의하였고, 일을 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번아웃이라는 녀석이 무엇이며, 언제 내 인생에 기어들어온 것일까. 언제 어떻게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첫 상담 끝트머리에 심리상담가인 사이먼에게 물었다.

“혹시 번아웃과 관련된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아직도 번아웃이 뭔지 모르겠어요. 다음 약속 전까지 공부를 좀 해보려고요.”

그러자 사이먼이 대답했다.

“세상에나. 이제 성실한 학생 따위는 집어치우세요. 어쩌면 지금껏 너무 착실하게만 살아와서 이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젠장,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