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를 사랑하는 방법』, 신현서 글, 심현경 그림
얼마 전 어머니의 칠순을 축하드리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회사를 빠지기 힘들었던 남편과 학교를 빠질 수 없었던 이든이는 독일에 남고, 유치원생인 이나만 데리고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듬직한 오빠, 이든이와 함께 있을 때는 투정 부리기 일쑤인 어린아이로만 보였는데, 막상 이나랑만 시간을 보내니 이렇게 의젓하고 착한 아이였나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긴 비행시간이었지만 한 번의 찡얼댐도 없이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면서 한국까지 도착했고, 엄마가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옆에서 조용히 꼬물꼬물 혼자 시간을 보내주기도 했다. 물론 한 번씩 엄마를 찾으며 같이 놀아달라 하긴 했지만, 2주 내내 또래 친구하나 없이 심심했을 법도 한데, 너무나 잘 지내줘서 우리 가족 모두들 이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이나가 유일하게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큰아빠‘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사촌 오빠이니, 큰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너무 길기도 하고 큰아빠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이든이가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러왔다.
“이나야, 큰아빠한테 잘해. 알겠지?”
독일에 있는 이든이와의 영상통화 중 들려온 소리였다. 평소에도 큰아빠한테 까불까불 대는 이나를 잘 알고 있던 이든이는, 이나의 안부를 묻는 대신, 큰아빠께 잘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큰아빠가 이나를 괴롭히잖아. 이나는 큰아빠한테 잘해. “
팽 토라진 이나가 대답했다.
“큰아빠가 이나를 좋아해서 그래. 원래 티라노 사우루스는 자기 새끼들을 입으로 물어 옮기는데, 그건 새끼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팔이 짧아서 그런 거야. 큰아빠가 이나를 좋아하는데 그게 큰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인 거야.”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우와-’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나와는 거의 20살 차이가 나는 이나의 큰아빠, 순한이 오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명절만 되면 나를 놀리고 괴롭혀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말씀으로는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나를 배 위에 올려 누고 비행기를 태워주며 침을 줄줄 흘려도 싫은 기색 없이 잘 놀아주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이빨 빠진 갈가지’라며 앞니가 없던 그 시절 나를 끊임없이 놀리던 그 모습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오빠가 이나에게 하는 것을 보면, 딱 옛날 내가 어릴 적 오빠한테 당했던 그대로다. 이나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아닌데?’하며 딴지를 걸거나, 가만히 있는 이나 옆으로 가서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한 번 해서 반응이 없으면, 두 번 세 번 찔러보며 이나가 ‘엥-‘하고 짜증을 낼 때까지 시도한다. 이든이가 말한 대로, 이것이 바로 큰아빠의 사랑법이다. 심심한 이나의 곁을 유일하게 지켜주는 사람. 이나가 투정을 부리고 짖꿋은 장난을 쳐도 다 받아주는 사람. 큰아빠가 퇴근만 하면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아빠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걸 보면, 이나도 큰아빠의 사랑을 다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공주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불타리우스’라는 이름의 못생기고 무서운 용이 나온다. 이 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드레 공주’를 사랑하지만, 입만 열면 불이 뿜어져 나오는 통에 공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어떻게든 공주와 가까워지고 싶어 노력하지만, 한 번의 한숨에 공주의 드레스를 태워버리고, 한 번의 딸꾹질로 공주가 아끼는 커튼을 태워버리고 만다. 이런 불타리우스의 마음을 알리 없는 공주는 화를 내기 시작하고, 불타리우스는 슬픔에 빠진다. 불쌍한 용을 지켜보던 비구름 할머니의 도움으로 공주 앞에서 드디어 입을 열게 된 불타리우스. 비구름 할머니가 내려주는 비를 맞으며 공주에게 드디어 사랑을 고백한다.
게리 채프먼이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말했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주된 사랑의 언어가 있다. 책에서는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을 예로 들고 있지만,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실제로는 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의 언어가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표현할 때는,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불타리우스는 시도 때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불 때문에 어떠한 언어로도 사랑을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진심을 다해 시도한 끝에 공주의 마음을 얻게 된다. 순한이 오빠의 사랑법 또한 게리 채프먼의 이론과는 꽤나 멀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사랑의 언어가 아닌, 본인이 제일 잘하는 사랑의 언어로 끊임없이 표현한다. 다행인 것은 그것이 결국에는 통한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언어로든, 나만의 언어로든, 사랑은 표현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꾸준히 나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언젠가는 가 닿는다. 그 끝이 해피엔딩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에 가득 찬 사랑을 표현하고 산다면, 우리네 인생이 조금은 더 알록달록하고 설레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