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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된다

『파랑 오리』, 릴리아

by 달하달하

가끔은 아무 기대 없이 좋은 책을 만나곤 한다. 밀리의 서재라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전자책을 읽기 시작한 우리. 내가 검색을 잘 못한 탓인지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동화책이 많지 않아 살짝 실망하던 차에, 『파랑 오리』라는 책을 만났다. 제목만 보고는 파란색 오리의 신나는 탐험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완벽히 벗어났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먹먹한 동화책이라니.‘



어느 평범한 가을날, 파랑 오리는 울고 있는 아기 악어를 만나게 된다. 파랑 오리는 가엾은 어린것을 안아준 그날로 악어의 엄마가 된다. 엄마의 보살핌 속에 쑥쑥 자라나는 악어를 보며, 파랑 오리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을 맛본다. 자기보다도 훌쩍 커진 악어를 보며 든든함을 느끼지만, 슬프게도 파랑 오리는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악어는 엄마가 자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연약해진 파랑 오리를 씻기고 먹이며 엄마의 곁을 지킨다.



‘나는 엄마의 아기였지만, 이제 엄마가 나의 아기예요. 내가 지켜 줄게요.’




나의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나를 많이 아껴주신 큰어머니가 계신다. 이제 80세가 다 되어가는 우리 큰엄마는, 일하느라 바빴던 부모님 대신해, 내 손을 잡고 유치원 운동회에 가주실 정도로 나를 살뜰히 챙겨주셨다. 가끔 큰엄마를 따라 포항에서 대구로 올라가는 기차를 탈 때면, 큰엄마는 항상 본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큰 어른이 내 눈을 지긋히 바라보며 대화해 주는 그 시간이 마냥 좋았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팍팍한 삶이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사랑하던 우리 큰엄마. 독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꼭 한 번은 큰엄마를 모셔와 아름다운 유럽의 성당을 보여드리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슬프게도 우리 큰엄마는 파랑 오리처럼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생기 넘치던 큰엄마의 표정은 사라져 가고, 말수도 점점 줄어 이제는 침묵이 큰엄마를 잡아 삼켜버렸다. 그래서 이제 한국을 찾을 때면 ‘잘 지내셨어요?’ 란 말 대신, ‘저 기억하시죠?’로 인사를 시작하는데, 머뭇거리던 큰엄마가 '조카딸'이라며 나를 알아보실 때면 나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엄마도 언젠가 할머니가 돼? “

“응. 엄마도 나이가 들면 할머니가 되지.”

“그럼 이든이가 엄마를 지켜줄게.”


바쁜 일상에 쫓겨 잊고 살고 있지만, 나도 이 책에 나오는 파랑 오리처럼 늙고 약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건강하고 여유로운 노년을 즐길 수 있기를 기도해 보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내가 어떠한 노인이 될지는 더 살아봐야만 알 일이다. 『파랑 오리』를 읽는 아이라면 누구나 이든이처럼 말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내가 파랑 오리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이든이가 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사느라 마음이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랑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다만 혹여나 내가 이든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내가 이든이를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기억이 사라지고 혼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더라도, 엄마의 따스하고 빛나던 순간을 함께 추억하고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떠나게 되는 날, 부디 나의 모나고 안쓰러운 모습이 아닌, 아름답던 순간만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을 들러 큰엄마를 뵐 때면, 나는 큰엄마의 쪼글쪼글해진 손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어릴 적 큰엄마가 들려주셨던 옛날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본다. 그러면 큰엄마는 입술을 꾹 다문채, 낯선 사람을 보는 듯 텅 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큰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살며시 입술을 깨문다. 고작 조카딸인 내가 기억을 잃어가는 큰엄마를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아주 짧게라도 정신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지금은 메말라버린 큰엄마의 얼굴에 어려있던,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기억하는 조카딸이 있다고. 큰엄마의 삶은 고달팠을지라도, 나에게 큰엄마가 보여준 세상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빛이 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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