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rates Next Door』, Jonny Duddle
2023년 가을 어느 날, 런던 출장에서 돌아오며 어김없이 들른 기차역 서점에서 이 책을 만났다. 열차 시간이 급해 후다닥 제목과 표지에 있는 그림만 보고, ‘해적이군, 이든이가 좋아하겠네.’ 하며 얼른 계산대로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내 옆집에 해적이 산다는 재미난 상상으로 만들어진 『The Pirates Next Door (이웃집 해적)』은, 꽤나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한 바닷가 마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밌을 것 하나 없던 이 동네에 살던 틸다(Tilda)는, 어느 날 허름한 청바지에 안대를 한 해적 소년 짐(Jim)이 옆집으로 이사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커다란 해적선에는 그의 기괴한 가족들이 함께였는데, 신이 난 틸다와는 달리 부모님과 이웃들은 모두 낯선 그들의 모습에 경계심을 표한다. 특히나 이웃 어른들은 고요한 동네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그들을 이곳에서 쫓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뼛속까지 해적인 짐과 그의 가족들은, 잠시 이곳에서 다시 떠날 채비를 할 뿐이라며 남들이 뭐라 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해적선을 고치고 다시 길을 떠나는 짐. 그의 가족들은 이웃들에게 작별선물을 두고 떠나는데, 깜짝 놀랄만한 선물들을 받은 이웃들은 언제 그들을 미워했냐는 듯, 환한 미소로 떠난 그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이웃'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올 초까지 머물렀던 벨기에 워터루에서 만난 이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직 그곳을 떠나온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이웃에 살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금세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첫 1년은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느라, 주변에 누가 있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 지나갔다. 이든이가 어린이집에 가면서 집 주변에 사는 이든이 친구네 집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이웃들을 알아갔다. 시간이 흐르며 김밥, 삼겹살구이 등 한식을 무기 삼아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또다시 그들의 집에 초대받으며 6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니, 지금은 어느덧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얼굴도 몰랐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이웃에 사는 이들의 얼굴을 익히고 웃으며 왕래하다 보니, 무미건조한 삶에 작은 행복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올여름 독일로 이사오며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이웃'이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거리에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오가던 벨기에의 동네와는 다르게, 빈집과 빈가게들이 즐비한 회색거리인 지금의 동네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또한 아무 표정이 없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슬어버린 독일어 때문에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기도 어려우니, 내게는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무채색으로 보였다. 외국인 이민자가 많은 동네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이 드문 이곳에서는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눈길이 쏠렸다. 왠지 내가 이든이 책에 나오는 이웃집 해적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서면 왠지 모를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옆집에 사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환히 웃으며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말해주는 그들을 보니 금세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나는 벨기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든이 이나 손에 김밥 한 접시를 들려 보내며, 이 새로운 이웃과 친구가 되었다.
대만으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또 '어떤 이웃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설렘과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타이베이에서는 고층 아파트에 살게 될 텐데, 주택에만 살던 이든이 이나가 혹여나 층간소음을 일으켜 이웃들의 핀잔을 사지는 않을지. 현지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이웃들과 인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지만, 여러 번 국경을 넘나드는 이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곳에 어떤 이웃이 있을까 걱정하기보다, 내가 어떤 이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닫고 움츠려있으면 아무리 좋은 이웃이 있더라도 만날 수가 없다. 내가 먼저 색안경을 벗고, 마음을 열어야만 주변의 좋은 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많은 걱정거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지금이지만, 대만에 도착함과 동시에 모든 두려움과 선입견을 버리고,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렇게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내 일상에, 나 스스로 아름다운 색 하나를 얹을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