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세탁기는 구슬프게 삐-익 삐-익 울어댔다
어느 평범한 화요일의 저녁. 퇴근을 하고 돌아온 남편은 아직 일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있던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안아주었다. 운동을 다녀오겠다며 상쾌한 마음으로 가방을 꾸리는 남편에게, 나는 저녁 메뉴로 샐러드가 어떻겠냐며 치즈와 파프리카를 사다 달라고 청하였다. 남편이 떠난 뒤, 후다닥 오늘의 업무를 마친 나는 바삐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난 후, 따끈한 물이 담긴 욕조로 뛰어들었다. 남편이 사준 나무 선반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뽀글뽀글 거품 가득한 욕조 안에서 좋아하는 방송을 시청하고 있노라니 하루의 피로가 어느새 싹 사라지는 듯했다.
노곤노곤 기분 좋은 한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돌아왔다. 굳이 욕실로 장본 물건들을 잔뜩 들고 들어온 남편은, 사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욕실 서랍 위에 올려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우선 치약부터 꺼내고..."
내가 사 오라고 했던 치약이 서랍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과자! 이 곰돌이 모양 과자 먹어봤어? 이거 정말 맛있어!"
빨간 봉지과자 3개가 테이프로 감긴 이벤트 상품이 서랍 위로 올라왔다. 진짜 맛있어서 샀는지, 싸게 나온 상품이라 마음에 들어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패스!
"그리고 이거, 짜잔!"
손바닥만 한 상자 하나가 남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거 초등학생용 수업교재인 것 같은데 마트에 있더라고. 문법이나 단어 공부하는 것 같아서 샀어. 잘했지?"
마크는 신이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땅히 마크와 함께 공부할 때 쓸만한 교재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잘됐다 싶어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후다닥 저녁식사를 해 치운 후, 마크는 그의 지정석인 거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경기에 열중했고, 나는 침대에 앉아 마크가 새로 사 온 독일어 교재를 열어 보았다. 내가 평소에 갖고 싶었던 카드 형태의 교재에는, 한 카드 당 받아쓰기 하나, 연습문제 세 개가 들어있는 꽤나 알찬 구성의 교재였다. 나는 거실로 달려가 "고마워, 그대가 최고!"를 외치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시간을 맞아 침대로 찾아온 마크는 나의 받아쓰기를 도와주기로 했다. 꽁냥꽁냥 기분 좋게 받아쓰기를 끝내고 첫 번째 연습문제를 풀려던 찰나, 거실에서부터 후반전이 시작되는 바이에른의 응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크는 꿋꿋이 첫 번째 연습문제를 내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두 번째 연습문제로 넘어가려는 마크를 막아서며, 나 혼자 풀어볼 테니 어서 가서 축구 경기를 마저 보라고 했다. 슈팅 찬스마다 움찔하며 거실에 있는 TV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크를 잡아두느니, 기다렸다 경기가 끝난 후 함께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크는 괜찮다며 계속 침대맡을 지켰지만, 나 또한 정말 괜찮으니 축구를 보러 가라고 마크를 떠밀었다. 결국 거실로 돌아간 마크는 그 맛있다던 곰돌이 과자와 함께 경기를 관람하였다.
경기가 끝난 후 마크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내가 풀어놓은 연습문제를 함께 확인해 주었다. 첫 번째 문제에서 학교와 관련된 단어들이 나와 "Grundschle(그룬드슐레)는 뭐야, Berufschule(베루프슐레)는 몇 살 때 다니는 거야?" 하며,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마크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마크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맡는 나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 우선 하던 문제풀이를 마치고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갔다.
"두 번째 문제, 위에 주어진 단어들은 짝이 있습니다. 옆에 놓인 단어와 짝을 맞춰보세요."
위와 같이 문제를 해석한 나는, 줄줄이 나열된 독일어 단어들을 두 개씩 끊어 읽으면 무슨 뜻이 나오겠거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발음할 때 운율이 같은 두 단어를 찾아보라는 문제였다. 땡!
"세 번째 문제, paar, Paar와 관련된 예문을 읽고 이해하시오. 이와 관련된 예문은 다음 과에서도 반복하여 나올 예정입니다. 끝!"
나는 예문을 읽었으니 문제를 다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대뜸 마크가 "도대체 뭘 한 거니?"라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 문제 빼고는 종이에 적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말하는 마크를, 나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혼자 꽤나 문제를 잘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도 다 틀려서 기분 나쁘구만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건가 자네는!' 우리는 한 동안 말없이 침대 위에 흩어진 독일어 카드만 쳐다보았다.
정적이 흐르던 그때, 욕실에서 '삐-익 삐-익'하고 세탁이 완료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크는 침실 문을 박차고 나가서는 바싹 마른빨래를 들고 와 침대에 뿌려두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빨랫감을 분주히 세탁기에 집어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 사이 나는 아무 말 없이 침대 위에 놓인 빨래를 접기 시작했다. 세탁기 버튼을 눌러두고 돌아온 마크도 침대에 걸터앉아 빨래를 개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잔잔하게 손이 가는 속옷과 양말은 내가 챙겨 개고, 마크는 자연스레 크기가 큰 빨래를 가져가 접었다. 우리 두 사람은 경쟁이라도 하듯, 말 한마디 없이 격렬하게 빨래 개기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다시 정적.
황당한 사람은 나지만, 당장 화가 난 사람은 남편이니 빨래를 챙겨 넣은 마크가 침대에 앉자마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여보, 지금 화났어?"
"응!"
하고 마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살짝 당황한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인지 물어도 돼?"
그러자 마크가 말했다.
"예전에 당신이 공부할 때 내가 잘 안 도와줘서 서운하다고 그랬지? 그래서 오늘 큰 마음먹고 당신 옆에서 공부하는 거 도와주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 밀어냈잖아. 그래서 혼자 하게 뒀더니, 문제도 제대로 안 풀고 대충대충 시간만 보냈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화났어."
우-하. 그래서 내가 답했다.
"나는 후반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서, 빨리 가서 축구 보라고 끊은 거지. 공부는 그 이후에 해도 되고, 내가 혼자 문제 풀어봐도 되니까. 나 나름에는 제대로 해석하고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나도 속상해."
마크 왈,
"이거 Übung(연습)문제잖아. 그럼 종이에 적어가며 풀어야지. 근데 당신 아무것도 안 적었잖아. 그럼 제대로 공부 안 한 거 아니야?"
또다시 내가 말했다.
"나는 '읽어보시오' 정도로 생각했지. 모든 연습문제가 다 종이에 적어가며 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마크는
"세상에 종이에 안 적는 문제풀이가 어딨어. 이건 독일어뿐만 아니라, 만국 공통적인 부분이라고!"
라며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또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야기할수록 유치하기 짝이 없고, 뭔가 감정적으로 틀어진 사람에게 더 말을 해봤자 안 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나 도와준 거 너무 고마워. 그런데 나도 당신 생각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경기 보라고 배려한 건데. 오늘 우리 둘 다 서로를 너무 배려하다 상처받은 것 같아. 서운하게 해서 미안."
"나도 미안."
마크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Sorry"를 외쳤다.
"삐-익 삐-익"
또다시 세탁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크는 세탁기를 건조 모드로 돌려놓고 잠을 청했지만, 나는 찝찝한 기분에 노트북을 펼쳐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며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데, 우이-씨."
"덜그락 덜그락 덜그락"
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며 문을 제대로 안 닫았는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침실까지 요란하게 들렸다. 잠이 들려던 마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 문을 닫고 돌아왔다.
나는 "미안"하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사과를 했지만, 속으로는 '내 요놈, 고소하다.' 생각하며 분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삭혔다.
이 어리석은 상황을 줄줄이 적어놓고 나니 나도 살짝 남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굿나잇 뽀뽀 따위는 해주지 않으련다. 잘 자라, 남편.
"Gute Nacht!"
Our little silly fight
Fighting between my husband and me alway starts from silly stuff. One fine day, he bought a german learning card from the super market. He wanted to help me, although there was a football game of Bayern München. He helped me during half time but I could hear the second half already starting. So I asked him to go and watch, but he wanted to stay with me. Since I could notice that his attention is on the TV even he was with me, I strongly urged him to go enjoy the game.
I thought that I was the generous one but I wasn't. He got mad cause I rejected his help. Suddenly our laundry machine made a big sound to let us know the laundry is done, he brought all dried laundry into the bed room. I started to fold it and he also joined without any word. Even though we didn't say anything, we know our system, small stuff for me and big laundry for him. I know that there is nothing we should get angry about at each other, but it happens sometimes. The only thing I can do is, being with him until he tries to say something to me. Even though slience is surrounding us, I know that we both know it's a silly situation and we will have a good morning kiss the next morn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