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는 어젯밤 고심 끝에 골라둔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짙은 녹색에 잔잔한 꽃무늬와 어깨 부분에 프릴이 있는 긴 원피스는 절친인 세아와 함께 골라 산 것이다. 세아는 너무 과해보일 수 있으니 화장은 옅게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송이는 평소에 입지 않는 원피스가 어색해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거울을 유심히 살폈다. 녹색이 좀 촌스러워 보이려나? 그냥 짙은 남색으로 살 걸 그랬나? 어제 그렇게 고민을 하고도 또다시 고민하는 송이였다.
송이는 남동생에게 가서 원피스가 어떤지 물어본다. 남동생은 여전히 이불속을 헤매고 있었다. 송이가 보채자 귀찮은 듯 누나를 훑어보더니 마지못해 괜찮다며 어서 나가라고 한다. 송이는 만족한 듯 다시 방에 들어가 화장을 고치고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는 또 한 번 거울을 들여보고 집을 나섰다.
시훈과는 입사 동기로 만나게 되었다. 매번 덤벙되고 어설픈 송이와 달리 시훈은 눈치가 빠르고 똑 부러졌다. 송이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아주는 시훈에게 고맙기도 했지만 은근히 생색을 내는 듯한 그의 말투가 얄미웠다. 디자인 팀 신입인 송이에게 오는 일들은 대부분 글감을 옮기는 것이었는데 확인을 몇 번이나 하고도 꼭 하나씩 틀리는 글자나 숫자가 나왔기에 영업팀인 시훈이 검수를 다시 한번 해주는 것이었다. 항상 바쁘게 디자인실을 오가는 그를 볼 때면 그와 달리 항상 같은 공간에 갇혀 같은 일만 반복하는 자신이 왜인지 안쓰럽게 느껴지는 송이였다. 어느 날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데 술냄새를 풍기며 시훈이 들어왔다. 거래처 접대 자리에 다녀온 그는 간신히 몸을 가누는 듯 했다. 정수기 물을 연신 마셔대던 그는 송이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송이는 그동안 얄밉게만 바라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며칠 뒤 등산을 좋아하는 사장님의 지시로 회사 사람들 모두가 등산을 가게 되었다. 이름 모를 산은 완만하지만 시간이 꽤나 걸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좋은 곳이었다. 혼자 걸어가는 송이에게 시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네?"
"어제 늦게까지 야근하시는 거 같던데."
"네. 괜찮아요."
힘들다고 한다면 그가 더 힘들 텐데 되려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는 그의 말에 송이는 괜히 미안해졌다. 언제나 말끔해 보이는 겉모습에 그만 속도 그럴 것이라 단정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송이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고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그였다. 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보이고는 흠칫 민망함에 휙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둘은 간간히 눈빛과 말을 주고받으며 산을 내려왔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왜인지 그도 그녀도 서로의 웃음이 - 자신의 웃음이 - 낯설기도 어색하기도 그리고 반갑기도 했다.
다음날 그녀의 책상에 따뜻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커피잔에 어설픈 글씨로 쓰인 메시지는 오랜만에 아침부터 웃음을 선물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시훈은 그다음 날도 회사 앞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며 문득 송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조심스럽게 톡톡쳤다. 돌아보니 송이였다.
카페를 나서며 오늘은 자신이 사주려 했다며 내일은 꼭 자신이 사겠다며 고개를 들어 작은 입으로 쫑알거리는 그녀를 보며 시훈은 생각했다고 한다. 오늘 고백해야겠다고.
데이트를 위해 아껴둔 셔츠를 꺼내 입은 시훈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을 - 마치 뜨거운 여름날 아이들의 웃음이 가득한 분수대의 풍경 같았고, 봄날의 시원한 바람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겨울이 끝나고 트는 초록색의 새싹이려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영영 잊지 못할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