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by 달리아

혼잣말을 하거나, 틱 장애를 보이거나,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거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경련을 하거나, 친구들을 사귀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나는 파트리스 쥐스킨트의 소설인 <좀머 씨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딘가 부스러져 있는 것 같은 아이들에게서는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라고 외치는 좀머 씨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픽사베이

예전부터 나는 문제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해 왔다.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의 배경을 본다면 아이들은 그 문제의 이유가 아니라 단지 이 세상의 여러 문제들을 보여주는 현상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기후 위기, 혐오 사회, 노키즈존, 코로나 팬더믹’ 등이 키워드인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설 땅은 빙하처럼 사라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 물질이 넘치지만, 그 풍요로움마저도 아이들을 위협한다.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어떤 아이에게는 지나칠 만큼 많은 것들이 주어지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기본적인 생활도 힘든,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을 너무 많이 주거나 부족한 화분의 식물들이 시들어버리듯, 적절한 양분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많은 아이들은 웃자라거나, 말라가고 있다.

@픽사베이

게다가 AI와 로봇 등의 비약적 발전으로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아이들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표와 방향이 되어주어야 하는 교육은 되려 더 많은 것들을 도입하며 혼란과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 ‘교육 시장’이라는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교육이 상품화된 것은 오래전 이야기이다. 하지만 부모의 불안과 죄책감을 기반으로 한 마케팅과 광고들은 학령기 아동과 청소년뿐 아니라, 초등학교 진학 이전의 유아와 영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6세인데 아직 한글을 모르냐?’ 등의 광고 문구는 어릴 때부터 또래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10여 년 전에 나는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나 받을 법한 학업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 최근 초등학교 저학년 학급은 들어가면 그런 무게에 짓눌려있는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교실 현장에는 바른 자세로 제대로 앉아있는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대로 몸을 반쯤 누인 듯 삐뚜름하게 앉은 아이부터, 아예 의자에 앉아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영어로 Beautiful이라는 어려운 글씨는 쓰지만, 제대로 앉아서 선 긋기를 하지 못한다는 주변 선생님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유네스코 세계장관회의에서 12세기 교육 모델로 선정된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인 슈타이너는 인간의 발달 단계를 7년 주기로 나누었는데, 0-7세까지는 아이들의 신체와 감각기관들이 충분히 발달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어른들은 따스하고 안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놀이를 위한 환경과 시간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한다. 신체 발달이 균형 있게 이루어지고 모든 장기들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때, 그다음 단계인 8-14세에서는 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힘과 바탕이 생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역으로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발달에 필수적이라며, 수많은 교구, 교재, 영상, 영양제 등을 떠밀어 넣고 있다.


10개월 동안 작고 어두운 공간에 머물다가 세상에 나온 아이에게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너무 많은 자극들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너무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논 아이들이 외상 후 장애인 PTSD 증상을 보였다는 것은 연구 결과도 그를 보여준다. 수많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생의 결정적 시기’라고 강조하는 시절이기도 한 생애 초기 7년은 삶을 살아가는 몸이라는 집을 짓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지나친 지적인 교육과 자극들을 주는 것은 기초공사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집 위에 억지로 벽돌을 쌓는 것만 같은 일이다. 그러다 보니, 견디다 못한 아이들은 감당하기 힘든 자극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높다란 벽을 쌓거나, 견디다 못해 무너지고야 만다.

@픽사베이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코로나와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는 아이들의 감각 발달과 정서에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이들의 안정적인 발달을 위해서는 이 세상은 안전하다는 신뢰와 주변 사람들과의 따뜻한 접촉과 교류가 필수적인데, 여전히 끝나지 않은 코로나 시기에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멀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교실에서도 몇 년간 서로 방어막을 치고,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친구들에게 갑자기 다가가려 하니, 당연히 마찰과 실수와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의 마스크 착용으로 서로의 얼굴 표정과 입모양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내는 것에 버퍼링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더 큰 전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초유의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그 후유증을 막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 속에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게슈탈트 놀이치료 전문가인 바이올렛 오클랜더는 <숨겨진 보물>이라는 책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 걱정이 되고 초조하고 두려워하며 슬퍼하거나 화가 나 있는 아이들은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자신을 제한하며 자신을 억제하고 자신의 부분들을 고립시키고 건강한 표현을 억제할 것이다. 감각과 신체가 제한될 때, 정서적 표현과 강한 자기감은 하찮아질 것이다.’


라며, 그러한 아이들이 다시 세상과 ‘접촉’ 하기 위해서는 ‘만지기, 바라보기, 보기, 경청, 듣기, 맛보기, 냄새 맡기, 말하기, 소리, 몸짓과 언어, 환경에서의 움직임, 접촉에 이르는 통로를 열어 줄 경험이 중요하다.'고 한다. 즉, 회복은 깨어지고 불균형한 감각들을 조율하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흔들리는 땅 위에서는 어떤 식물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에게는 결코 잘못이 없다.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없다. 아픈 아이들의 뒤엔 불안한 부모가, 불안한 부모 뒤에는 병든 사회가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저 아프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다. 이제, 미루지 않고, 바로 그 비명을 들을 때이다.


“날 좀 가만히 둬.”

라는 절규는 사실,


“제발 나를 제대로 좀 도와줘.”

라는 절박한 요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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