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노량진에서 재수를 할 때였다. 인파가 많은 맥도널드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내 가슴을 움켜만지고 지나갔다. 너무 당황하고 놀란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얼어붙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대낮에 일어난 일이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없었다. 대학생이 된 뒤에, 잠시 호감을 가지고 만나게 된 사람은 갑자기 두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도,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몰랐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표현도 최근에야 듣게 되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에서는 누군가의 주도하에 내게 한 명씩 돌아가며 단체로 비난을 쏟아붓는 일이 있었다. 그곳에 있던 누군가는 훗날, 마치 인민재판을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정말 다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한 때 마음을 나누며 함께 했던 사람들이 던졌던 화살들은 내 존재를 더 깊이 파고들어,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 숨어서 지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폭력의 기억들은 어둠으로 밀어 넣어 움추러들게 하였다.
때때로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때때로 아침이 밝아도 일어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죄책감과 자책감은 나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속으로만 삭였던 상처들은 때때로 정리를 하지 않고 쑤셔 넣은 옷장의 문을 제멋대로 열고 튀어나왔다. 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때때로 실신을 하기도 했고,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이름도 생소했던 병이 트라우마의 대표적인 증상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웃고 있어도, 가슴은 괴로웠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나의 행동은 과장되었다. 그 때문에 생겨난 들뜸과 우울의 감정들 때문에 조울증이나 다른 정신병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가족들에게 그 상처가 칼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내게 세상은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기에 나는 작은 자극에도 무척 예민했고, 내 안에서 깨진 신뢰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되어 내 주변을 찌르기도 했다. 차마 해결하지 못했던 고통이 전이가 되어, 내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어 나의 상처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게 있었던 일들을 꺼내놓았을 때, 누군가
"맙소사, 생존자이시군요!"
라고 했던 말을 처음 듣고서는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들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있는 나 자신에게, 사실은, 그토록 살고 싶어 헤매었던 모든 여정들에,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다시 회복해갈 수 있게 도와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그 여정에서 여러 분야의 심리상담전문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누군가 '트라우마는 자신을 압도하는 공포로 인해 숨이 멈춘 상태'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트라우마가 생겨났던 순간은 내 삶의 정지화면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많은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그 시공간들로 돌아가서, 멈춰있던 나를 꺼내고, 깨워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조차 몰랐던 과거의 많은 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건네고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면을 들여다보니,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이나 사건들도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것을 직면하고 해소할 때마다 나는 더 크고 깊게 숨을 쉬며 살아있음의 감각에 감사할 수 있었다.
몇 년간의 치열한 작업이 이어졌고 많은 막혀있던 부분들이 다시 흐르고, 묶여있던 것들에게서 풀려날 때마다 자유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삶에서는 피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과 고통들이 계속 일어나기에 자신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은 남은 생동안 계속해나가야 하는 과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트라우마 작업에 있어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닻을 내리는 듯한 중심은 매우 중요한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쌓인 일상의 리듬과 새로운 좋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쌓여가는 유대감은 내가 다시 땅을 딛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최근 일어난 이태원 참사와 그 뒤의 과정들을 바라보며, 내 안의 여러 층들에서 크고 작은 진동들이 있었다. 특히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희생자분들의 가족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떠올리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겪었던 짙은 고통과 어둠의 시간들이 떠오르며,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힘들고, 아픈지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만약 누구든 지금 여러 원인으로 생긴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다면, 두 눈을 보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가만히 안고서 한참 동안 등을 쓸어주거나, 손과 발을 만지며,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온기를 전하고 싶다. 그러함으로 그 사람이 고통에 잠기거나 굳어버리지 않게, 함께 깊고 긴 숨을 쉬며 옆에 있어주고 싶다.
용기를 내어, 나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드러내는 글을 쓰는 것도 혹시나 그때의 나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가진 이에게 작은 온기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는 나태주 시인의 싯 구절처럼, 멀리서나마 당신이 고통에서부터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 마음이 따뜻한 비가 되어 전해지길 바란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어도 아침은 오고, 저녁은 온다. 때론 그것이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굳어있고, 얼어붙어있던 것들이 다시 흐르기도 한다. 어딘가에서 숨죽이며 울고 있는, 이 세상의 아침과 저녁을 살아가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에게 아래의 시에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한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멀리서 빈다', 나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