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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pr 21. 2016

남민아

꿈에 카메라를 가져갔어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나는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스니커즈를 신은 편한 차림이었다. 오른쪽 어깨엔 카메라까지 멘 채로. 어리둥절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집을 나선 기억이 없다. 기억해 내려해도 자꾸만 뚝뚝 끊어지는 의식들로 머리가 멍멍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까만 바위가 험상궂게 솟아있었다. 빙그르르 제자리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먹구름이 낀 하늘과 까만 바위들뿐.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왠지 으스스했다.


발아래로 시선을 두자, 그곳에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잔잔하게 고인 물 표면에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내가 눈을 깜박이자,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물에 비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폴짝.

웅덩이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온몸에 형광빛이 도는 파란색 개구리였다.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이 오묘하게 빛났다. 한발 다가가자, 녀석은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폴짝. 잠시 멈췄다가 나를 돌아봤다가 또다시 폴짝. 나는 파란 개구리를 따라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바위들이 제멋대로 겹치고 겹쳐져 솟아있는 위태로운 산이었다. 까딱 발을 잘못 내디디면 바위들이 흔들리고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아래가 까마득했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후후.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위를 쳐다봤을 때, 파란 개구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겨우 올라간 정상. 그곳은 바람 한 점, 소리 한 줌 없이 고요했다. 매캐한 스모그 같은 먹구름만 구물거리고 있었다. 앞서가던 개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내 가슴께에 검은 창문 하나가 떠 있었다. 불투명한 창문 너머는 먹구름을 잔뜩 구겨 넣은 듯 짙은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그 창문을 열고 싶었다.

창문을 열었다. 그곳엔 파란 슈트 차림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남자는 잔뜩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왜소한 몸이 그래서 더 작고 말라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동그란 안경테 너머로 새까만 눈이 반짝 빛났다. 아마도 당신은...


“무사히 왔군요. 여기로 들어올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다리부터 집어넣어 창문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내 손을 붙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끈적하고 축축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곳은 집이나 성 같아 보이는 어두운 건물이었다. 천장이 아주 높았다. 얼마나 높은지 조명이 밤하늘 별처럼 아득하게 빛났다. 바닥에는 까만 돌들이 깔려있었다. 좁은 복도를 감싸고 짙은 청회색 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나는 남자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오래된 건물인가 봐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죠.”


건물처럼, 사진들도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흑백 사진 속에는 얼굴들이 담겨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옷차림도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사진 속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모두 나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어떤 남자의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저... 이 사람 알아요.”

“아! 그 사람이군요.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게.”


“만나본 적 있으세요?”

“물론. 저쪽에 있어요.”


남자의 뭉툭한 손가락이 반대편 창문을 가리켰다. 불투명한 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정말로 이 사람이 저기 있단 말인가요?"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빛을 향해 다가갔다. 쿵쿵쿵 온몸을 울리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나는 창문을 열었다.


눈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짭조름한 바람이 얼굴을 비벼댔다. 그리고 쏴아아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곳은 바다였다. 창문 아래로 컬러풀한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과 새파란 바다. 그 가운데를 가르는 넓고 긴 모래사장. 색색의 파라솔이 야자수처럼 심어져 있었고, 눈길 닿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있었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모래성을 쌓는 사람, 텀블링하는 사람,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사람, 수영하는 사람, 튜브 위에 누워 둥둥 떠다니는 사람.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마음껏 찍으세요.”


카메라를 가져오길 잘했어. 나는 벅찬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이 멋진 풍경을 찍으려는 찰나, 뷰파인더 한가운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파란색 수영복 바지를 입은 남자는 오른 어깨에 커다란 까만 튜브를 감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찰칵.

나는 셔터를 눌렀다. 남자를 찍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튼튼한 다리와 까맣게 탄 건강한 몸, 모래가 잔뜩 묻은 굵은 팔뚝에 아주 잘 어울리는 커다란 튜브, 그리고 눈이 숨어버릴 정도로 환하게 웃는 젊은 얼굴.


“아빠!”


나도 손을 흔들었다. 아빠는 젊고 튼튼하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런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신기한 꿈이네요.”

“그렇죠? 아빠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어렸을 때, 엄마가 치워둔 아빠 영정사진을 몰래 찾아서 보곤 했어요. 그거 알아요? 영정사진은 컬러여도 이상하게 흑백사진 같아요. 그래서 뭔가 오싹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사진 속에 아빠는 항상 무표정이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아빠는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구나.’하고 생각했었죠.”


“꿈속에 그 사람이 아빠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얼마 전에 옛날 사진 하나를 발견했어요.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어요. 아빠는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타이어 튜브라고 하죠? 엄청나게 큰 까만색 고무 튜브를 오른팔에 감고서 웃고 있었어요. 사진 속에 아빠는 창창한 젊은 청년이었어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아빠가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거든요. 그 모습이 되게 인상 깊었나 봐요. 꿈에 카메라를 가져가길 잘했어요. 아빠를 찍었잖아요. 평생 만나본 적도, 손을 잡아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아빠는 아주 멋진 사람이었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해요.”




세 번째 사람글.

'남민아' 님의 꿈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기억을 나누어 주고 계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완성된 사람글을 쓰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요. 제가 전해 들은 타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상상해보고, 어떤 부분을 확장시켜 글로 쓸지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쓸 수 있는 글인지 아닌지도 판단 해야 하죠. 그래서 보내주신 모든 사연을 써드릴 순 없는 점, 빨리 소개해드리지 못하는 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


사실 <그녀의 사람들>은 많은 주목을 받는 매거진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실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고작 '작가'라는 타이틀 덕분에 독자분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공짜로 만나고 있네요. 보통 사람들의 숨어있던 기억들- 보내주신 서툰 글자들이, 따옴표 안에 살아있는 진짜 말들이 너무 따뜻하고, 또 어떤 때는 너무 아파서 자꾸만 제 마음을 울립니다.


며칠 전에는 한 독자분의 사연을 읽고선 대낮부터 주룩주룩 울었던 적도 있어요. 참 주책 맞은 작가죠? 제가 감히 여러분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음이 행복합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뭉클하고 좋아서 눈물만 나고 그래요. 기꺼이 기억을 나눠주신 독자분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녀의 사람들> 기획 이야기 읽어보기

https://brunch.co.kr/@daljasee/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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