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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7. 2016

목요일의 추어탕

찬바람 불 땐 추어탕 한 그릇

어릴 적, 먹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싫은 음식들이 몇 있었다. 


나의 어린 마음을 공포로 뒤흔들었던 음식의 기억. 시장에서 흐물흐물 삶아진 돼지머리를 본 날, 사람들은 그걸 눌러 만든 고기를 먹는단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편육의 기억. 또 어느 날은 냄비 뚜껑을 열어젖힌 순간, 할퀼 듯이 솟아있는 수십 개의 시뻘건 발들을 목격하곤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렸던 닭발의 기억.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은 단연코 추어탕이다.


아직도 생생하다. 할머니의 고무다라이에 미끌미끌 꿈틀꿈틀, 몹시도 요상하게 생긴 물고기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할머니, 이게 뭐야?” 곁에 쪼그려 앉아 신기하게 구경하던 나에게 할머니는 “미꾸라지여, 미꾸라지.”하고 씨익 웃더니 다라이에 굵은소금 한 주먹을 패대기쳤다. 그런데 녀석들, 소금을 맞자마자 거품을 물고선 발작하듯 몸부림치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들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몇 마리는 살겠다고 다라이 위로 밖으로 튀어 오르던 치열한 몸부림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고야 말았다. 이어진 할머니의 확인사살 한 마디. “싹 다 갈아먹어 버려야지.”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갔더랬다. 그랬다. 그날 이후, 나에게 추어탕은 먹어보지도 않았지만 절대로 먹고 싶지 않은, 그냥 무작정 싫은 최악의 음식이었다. 


추어탕과 재회한 건 스물여덟 방송작가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과 직접 채취한 지역 특산물로 향토 음식을 만들어 소개하는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가을 제철 음식을 취재하는데 팀장님이 말했다. 


“고작가, 추어탕 하자. 만드는 과정 죽이지 않냐? 미꾸라지 그림 좋잖아!” 


미꾸라지라니. 끔찍한 추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하는 게 방송작가의 숙명, 내 방송을 위해서라면 뱀이든 미꾸라지든 일단 만나러 가야 했다. 그렇게 억지로 등 떠밀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 산골 마을 논두렁에서 산적처럼 생긴 이장님과 통발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10월 중순께였지만 산골은 일찍이 추웠다. 먹구름 가득한 잿빛 하늘에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음산한 날이었다. 우린 허벅다리까지 끌어올린 긴 장화를 신고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로 오들오들 떨면서 통발을 끌어올렸다. 흙탕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꿈틀이들. 어이, 오랜만이야. 역시나 괜찮은 비주얼은 아닐세. 그렇게 나는 통발 가득 꿈틀대는 미꾸라지와 재회했다. 


이장님은 제대로 손맛을 보여주겠다며 굵은소금을 뿌리고 생동감 넘치게 맨손으로 미꾸라지를 손질하셨다. 녀석들의 몸부림에 군데군데 흙탕물이 튄 이장님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아, 정말이지 팀장님 말씀처럼 죽이는 그림이긴 했다. 정말로 뭔가 하나 제대로 죽일 것 같은 섬뜩한 그림이랄까. 대체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추어탕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나 궁금했다.  


후닥닥 하루 해가 넘어가고 촬영은 끝이 났다. 긴장과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노곤노곤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쫄쫄 굶으며 고생한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늦은 식사를 준비했다. 


커다란 상 하나 펴고 다 같이 빙 둘러앉아 스테인리스 국그릇에 뜨거운 추어탕을 나눠 담았다. “작가 아가씨, 고생했소. 맛있게 드셔.”라며 어르신들이 권하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나는 김이 폴폴 나는 황토색 국물을 아주 조심스럽게 떠먹어보았다. 그런데 으응? 앗, 세상에! 추어탕이 이렇게 고소할 줄이야. 진한 흙 맛 같은 묵직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갓 지은 흰쌀밥에 달짝지근한 시래기 하나 올려 걸쭉한 국물과 함께 떠먹는 추어탕. 입안 가득 퍼지는 뜨끈하고 달곰한 그 맛이 추위로 꽁꽁 얼었던 코끝을 찌잉 울렸다. 내 마음도 찌잉 울렸다. 아, 맛있다. 힘이 난다. 나는 뜨거운 스테인리스 국그릇을 끌어안은 채 한 그릇 뚝딱 깨끗이 비워냈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이 개운했다. 잊을 수 없는 추어탕의 맛이었다. 



찬바람 부는 이맘때, 추어탕은 특히 맛있다. 가만 보면 한자 ‘미꾸라지 추(鰍)’는 물고기 어(魚) 자와 가을 추(秋) 자가 합쳐져 있다. 미꾸라지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통통해지고 영양도 맛도 그만이라 예로부터 가을의 물고기라 불렸다고. 게다가 탕에 들어가는 가을 시래기는 다른 계절과 달리 유독 달짝지근한 맛을 내기에 가을 추어탕은 진하고 달곰한 맛이 난단다. 


하지만 이렇게 백번 말해봤자 모른다. 직접 먹어봐야 안다. 세상에는 비주얼은 썩 그렇지만 엄청난 맛을 간직한 음식이 있다는 걸 나도 해마다 배워가는 중이다. 제철 음식을 찾아 먹으러 다니는 어른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마도 이게 계절이 바뀌는 즐거움, 나이를 먹어가는 괜찮음, 한 그릇에 담긴 뜨거운 행복이 아닌가 싶다.


아직 난 추어탕에 산초가루를 팍팍 뿌려 먹는 정도까진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코끝에 찬바람 불 때, 으슬하니 감기가 올 것 같을 때, 힘을 내고 싶을 때 뜨끈한 추어탕 한 그릇을 떠올리게 되었다. 산초가루 대신 부추 팍팍 올리고 시래기와 한 숟갈 떠올려 후루룩 뚝딱 먹어야지. 


미꾸라지만 봐도 기겁을 했던 내가 찬바람 불 땐, 핫초코 말고 추어탕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될 줄이야. 새삼 어렸을 땐 상상도 못 했던 어른 여자의 모습이라 웃음이 난다.  





이 글은 여성중앙 11월호 '어른의 맛' 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엊그제에도 추어탕을 찾아 먹었을 정도로 저는 이제 추어탕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만드는 과정은 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거예요. 하하. 


요즘 찬바람이 불어요. 모두들 맛있는 제철음식 챙겨 드시고 몸도 마음도 힘내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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