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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y 27. 2017

우리, 마음껏 행복해지자

자전거를 타는 저녁

처음 혼자서 자전거를 탔던 날을 기억한다. 열 살 되던 해였다. 동생과 나는 어린이날 선물로 자전거를 선물받았다. 누나는 열 살인데 자전거도 못 타냐며 남동생에게 타박을 받으면서 나는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 우리는 자전거를 끌고 학교 운동장에 놀러 나갔다. 동생은 씽씽 잘만 타는데 나는 자꾸만 넘어질까 무서워 주춤거렸다. 그러다 깜빡 긴장을 잊은 순간이었다. 자전거를 잡아주던 동생이 손을 놓아버린 것도 모르고 나는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자전거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갔다. 포근한 저녁 공기와 뺨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 쉬이 쉬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달리고 있을 뿐인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와락 품에 안겨 오는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서, 나는 차릉 차릉 경적을 울리며 어두워진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즐거운 기억이었다. 이후로도 자전거는 내 유년시절과 함께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도시 생활을 하면서 나는 바빠졌고 자연스레 자전거를 잊고 살았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다시 자전거를 만났다. 바쁘다고 마땅한 취미 하나 없는 게 아쉬워서 운동 겸 ‘자전거 타기’ 취미라도 가져볼 작정이었다. 나는 검은색 몸체에 조그만 바퀴를 가진 귀여운 자전거를 샀다. 타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자전거 가게 앞을 두 바퀴 돌아보았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신기하게도 몸이 자전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부터였다. 나는 자주 한강공원에 나가 자전거를 탔다.


날씨가 좋은 저녁이면 서둘러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한강 너머로 천천히 밤이 오고 있었다. 그럼 난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구나’ 하는 뿌듯한 힘으로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달린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비벼온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스친다. 짙은 풀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풍경들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단지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뿐인데 기분이 좋았다. 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행복이 내게 안겨 왔다. 자전거를 타는 저녁은 그랬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저녁을 맞이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산다. 한때 내가 자전거를 잊고 살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만원 전철과 불 켜진 건물에 갇혀서 자전거 타는 법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하늘과 바람을 느끼는 일조차 빠듯한 하루가 안타깝다. 세상사는 일도 자전거를 타는 일처럼 조금만 여유롭다면 참 좋을 텐데.

자전거 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초여름이다. 초여름은 유난스럽지 않다.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평온한 날씨가 이어지고 꽃과 식물들이 건강하게 피어난다. 해가 져도 곳곳에는 기분 좋은 생기가 넘쳐흐른다.


시인 메리 올리버는 ‘평온한 날씨도 엄연히 날씨이며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평온한 날씨에 한가롭게 자전거를 타는 일. 하루의 끝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람을 느끼는 일. 이처럼 특별하지 않아서 소소하다 느끼는 일들이야말로 나는 특별하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언젠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날이 있었다. 넘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처음이 있었고, 비틀거리던 자전거가 부드럽게 굴러가던 신기한 순간이 있었다. 차릉 차릉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를 달렸던 기분 좋은 날이 있었다.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을 뿐, 자전거를 타는 일은 이토록 즐겁다.  


날씨 좋은 날, 한 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러 가는 건 어떨까. 복잡한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저녁. 두 발로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우리, 마음껏 행복해지자.



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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