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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04. 2017

월요일의 기러기

네가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일 년쯤 살다 오려구."


친구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 년쯤 지나면 돌아올 것 같다고 했지만, 말 그대로 추측이었다. 일 년이 될지 이 년이 될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목적 없는 여행이었다.

  

떠나는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하고 싶었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한국어 책이 그리울 것이다. 배낭 속에 넣어도 두껍지 않고 가벼운 책, 하지만 천천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시집 한 권을 샀다. 사둔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우연이었을까. 바로 옆에 친구가 선물해줬던 책이 있었다.  


스물네 살 때였을 것이다. 하루는 친구가 가방에서 읽고 있던 시집을 꺼내 내게 줬다. 동서양 시인들의 잠언시를 모은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었다. 워낙 유명한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남들 모두 읽는 책은 왠지 모르게 읽기 싫어지는 이상한 심보 때문에 그 책이 데면데면했다. 집에 가져온 시집 앞날개에서 친구의 그림을 발견하고 잠시 웃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당시에 친구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챙겨 들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공부했다.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린 그림 같았다. 엄마와 큰 언니, 작은 언니와 형부, 그리고 내 친구. 문제집 위에 그린 가족 얼굴을 하나씩 잘라 시집 앞날개에 끼워 두었다. 책을 펼치자 팝업북처럼 불쑥 가족들이 튀어나와서, 내 친구 참 귀엽다며 나는 한참 웃었다. 그 기억뿐. 나는 시집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후로 7년이 지났다. 친구는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 몇 년 더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바리스타 일을 배워 작은 카페를 차렸다. 처음엔 꽤 잘 되는 듯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책도 읽고 단골손님들도 만나는, 그런 일본 영화 주인공 같은 카페 주인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이냐며 나는 부러워했다.


그러나 카페일은 상당히 고됐다. 돌아서면 쌓이는 일거리에 잠시 앉을 시간조차 없고 식사 시간이면 더욱 밀려드는 손님들로 종일 굶기 일쑤였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매출과 잦은 진상 손님 때문에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게다가 주변에 하나둘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는 4년 만에 카페를 정리했다. 그동안 나빠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서른이 지나갔다. 친구는 말했다.


"나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다들 뭔가 하나씩 이루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나는 친구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커피만 홀짝거렸다. 친구가 내려준 커피가 훨씬 맛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 년이 지났다. 친구는 돌연 떠나겠다고 했다. 뭐가 있을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냥 떠나보겠다고.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아니었다. 차분하지만 단단한 눈빛으로. 친구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그런 친구가 좋았다. 떠나는 그 애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다.


책장에서 친구의 시집을 발견한 날, 나는 처음으로 그 시집을 읽었다. 어김없이 책날개에서 튀어나온 친구의 가족들과 인사하고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밑줄 그은 문장이 많았다. 스물네 살 외로운 내 친구가 도서관에 앉아 하늘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공감했던 문장들이, 이제 와 읽으니 참 먹먹하다. 어떤 문장들은 너무 유명해서 듣고 또 들었던 말들인데도 사무친다. 그때 너는 이런 마음으로 밑줄 긋고 있었구나. 친구의 과거를 더듬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것 또한 우연인지, 마지막 페이지에서 친구가 밑줄 그은 시는 메리 올리버의 시. 내가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샀던 시집의 작가였다.


떠나기 이틀 전, 나는 친구에게 손편지와 시집 두 권을 선물했다. <완벽한 날들>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친구가 밑줄 친 시집을 다시 돌려줬다. 친구는 반가워했다.


"나 이상하게 얼마 전에 이 책 생각이 났어. 여기 내가 그림 그려둔 거 있지 않았어?"
"응. 너 참 귀엽다고 얼마나 웃었는지... 그런데 네 얼굴 왜 이렇게 심술궂게 그려놨어?"


"나 이렇게 생겼잖아."
"아냐. 너 얼마나 잘 웃는데. 예뻐."


차르르 책을 훑어보던 친구가 말했다.


"내가 밑줄도 쳤었구나. 읽을 때 불편하지 않았어? 난 아직도 고민되더라. 밑줄 친 책을 선물로 줘도 될까 하고."
"나는 더 좋았어. 밑줄 친 부분들 지금 와서 읽어보니까 그때, 네 마음이 어땠는지 조금 알겠더라."


그럼 다행이다. 대답하며 친구가 수줍게 웃었다.


"이 책, 왠지 지금 너한테 필요할 거 같았어."
"고맙다. 다시 돌려줘서."


친구는 조금 헤진 책 표지를 가만히 매만졌다. 그때 네가 밑줄 그은 문장들이 지금의 너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더 외롭고 더 불안했던 그때의 너는 이제 좀 홀가분해졌니. 괜찮아졌니.


웃고 있는 친구의 옆얼굴이 잔잔하다. 너무도 평화로운 지금 이 순간이 갑자기 뭉클해서 눈물이 조금 고였다. 외롭다 힘들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리는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헤어지는 길에 친구를 오래 안아주었다. 잘 다녀와. 너도 잘 지내. 등을 토닥이는 서로의 손이 따뜻했다.

 


친구가 밑줄 그은 마지막 시는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였다.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위로.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매 순간 세상은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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