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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23. 2017

이봐요, 당신 삶이 아름다워요

누군가의 뒷모습에 담긴 이야기들

특별할 것 없는데도 빤히 바라보게 되는 모습이 있다.


누군가의 뒷모습들 – 앞서 걷는 사랑하는 사람의 등.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연인. 나란히 걸어가는 노부부. 수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 계단에 구부정히 앉은 아저씨.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 늙은 개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할머니.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아주머니. 


그런 뒷모습들을 볼 때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뭐라 설명할까. 그저 스쳐 가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지만, 알고 보면 오롯이 타인의 눈에만 비치는 외진 모습이기에. 그림자처럼 짙고도 외로운 색깔을 드리우기에. 뒷모습은 뭉클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주 걸음을 늦추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삶을 짐작해본다. 정작 당신은 모르는 뒷모습에 담긴 이야기를.



하나. 아무래도 당신은 슬퍼 보이네요


황사가 거세던 뿌연 오후였다. 은행 옆을 지나가다가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담벼락을 마주 보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여자의 뒷모습. 가방은 곁에 떨어져 있었고 허름한 재킷 밑단은 바닥에 끌려 지저분했다. 웅크린 여자의 등이 보였다. 따갑게 불어대는 황사 바람에 물 빠진 갈색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퍼져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알싸한 모습이었다. 나는 흘깃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담벼락을 마주 보고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태우지도 않는 담배는 저 혼자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 스무 살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친권자의 동의가 없어서 학자금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직원의 말에, 나는 은행 옆 골목에 숨어 들어가 눈물을 훔쳤었다. 그때는 몰랐다. 눈물로 어룽지는 골목길 바닥에 어째서 그토록 많은 담배꽁초가 있었는지. 


은행은 울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대낮이었고 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자꾸 그녀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래도 단단한 담벼락이 그녀 앞에 막혀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도 그녀의 눈물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조병준 시인의 사진. 따뜻한 슬픔


나는 당신의 행복을 미리 보았어요

     

남편과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우리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바퀴는 아예 아스팔트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도. 몸도 마음도 진득하게 지쳐버려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앞에 선 트럭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소형 고물 트럭이었다. 곳곳에 녹이 슬고 때가 껴서 한층 더 허름해 보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조금 이상했다. 빈 화물칸에는 아이 책가방 하나만 달랑 놓여있었다. 빨간색 이름표가 앙증맞게 붙어있는 파란색 책가방. 나는 가방의 주인이 궁금했다. 트럭 운전칸으로 시선을 옮기자, 뒤통수 두 개가 보였다. 운전석에 큰 뒤통수와 보조석에 작은 뒤통수. 보조석 뒤통수의 앉은키가 낮고 조그만 걸 보니 아마도 가방의 주인인 듯싶었다.


"오빠, 저 트럭에 탄 사람들 아빠랑 아들인 거 같아." 


나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운전석 뒤통수는 큰데, 보조석 뒤통수는 어깨까지밖에 안 와. 저기 봐봐. 화물칸에 꼬맹이 가방 보여?" 

"그러네."

"아빠랑 아들인가 봐. 그런데 되게 정답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다 알아."


트럭에 앉아 있는 두 뒷모습은 자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빠는 아들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고, 아들은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빠의 오른손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눌 부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 부부가 괜히 심각한 것 같았다. 막히면 좀 어때. 볕에 타면 좀 어때. 노래나 들으면서 얘기나 나누면서 천천히 가자.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서서히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호 턱을 넘을 때마다 화물칸 가방에 달린 이름표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나는 그 이름표의 주인공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모를 테지만, 한 20년쯤 시간이 지났을 때, 너는 이 순간을 행복했던 한때로 떠올리게 될 거야.’


누군가의 행복이 너무나도 빤히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영화 '어바웃 타임' 스틸컷. 어린 팀과 아버지의 마지막 산책


뒷모습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니, 당신은 영영 모를 테지만 슬픔도 행복도 모두 당신의 등 뒤에 펼쳐져 있다고. 스쳐 가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지만, 몹시도 뭉클한 모습으로. 그림자처럼 짙고도 외로운 색깔로.


'이봐요, 당신 삶이 아름다워요.' 


다가가 속삭여 주고 싶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모른 척 지나가야 오래오래 머무는 법. 나는 단지 발걸음을 늦추고 당신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웅크리고 그렇게 걷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삶은 우리의 등 뒤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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