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Jul 30. 2017

마음이 마음에게

나만 몰랐던 그날의 선물

서른두 번째 생일에 수국 꽃다발을 선물 받았다. 품에 안아보니 수줍은 연분홍색 수국이 소복이 피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언젠가 지금처럼 수국을 안았던 적이 있었지. 아슴아슴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겐 친한 친구 셋이 있다. 그중 둘의 생일이 일주일 사이로 붙어 있어서 친구들 생일 주간이 다가오면 다 같이 만나 축하하곤 했다. 스물다섯 살, 그해 생일 주간에도 우린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오랜만의 만남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미 돈을 벌고 있는 친구들과 달리, 취업준비생인 나는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못했다. 솔직히 책 한 권조차 선물할 돈이 없었다. 이런 사정을 말하자니 너무 부끄럽고,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사정이 있어서 못 나간다고 할까. 그래도 친한 친구들인데 축하는 해줘야지.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다.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 그때까지도 나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손편지가 전부였다. 어쩌지. 뭐라도 사 가야 할 텐데... 잔뜩 풀이 죽은 채로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 문득 바닥에 활짝 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국이었다. 색색의 수국 화분이 꽃집 바닥에 조르르 놓여있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을 비닐 포장지로 감싸고는 ‘5000원’ 가격표를 붙여둔 채로. 하지만 워낙 꽃이 예뻐서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크기도 큼지막하니 선물로 모양새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하늘색과 연분홍색 수국 화분을 샀다. 하늘하늘 분홍분홍. 소복한 꽃송이를 바라보자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산뜻해졌다.


커다란 종이가방에 화분을 담아 들고선 전철을 탔다. 부천역에서 구로역까지. 사람 많고 오래된 1호선 전철은 덜컹덜컹 흔들렸다. 행여나 사람들 틈에 꽃이 망가질까, 화분 속 흙이 쏟아질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가방을 감싸 안았다. 차창으로 햇볕이 쏟아질 때마다 종이가방 틈으로 수국이 보였다. 예쁘기도 하지. 속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생일 축하해. 반가움 속에 안부와 선물이 오갔다.


"꽃이 예쁘길래... 생일 축하해."


나는 멋쩍게 화분과 손편지를 건넸다.


"예쁘다! 나 꽃 선물 진짜 오랜만에 받아 봐."

"손편지까지 정성이다야. 고마워."


아, 다행이다. 선물을 받아 든 친구들은 예쁘다고 고맙다고 웃었다. 그제야 나는 마음을 놓았고,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친구들은 화분을 품에 안고 수원으로,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돌아갔다.


이후로도 친구들은 자주 연락해왔다.


'물 주고 있어. 수국은 물을 좋아해서 많이 줘야 한대. 이제 꽃은 졌어. 그래도 잎은 멀쩡해. 푸릇푸릇하다. 수국은 꽃향기가 거의 안 났거든, 이제 보니까 잎 내음이 더 좋은 거 같아.'


사진을 보내며 꽃의 안부를 전했다. 오천 원짜리 수국 화분은 수원과 인천에서 튼튼하게 살았다. 꽃 화분이라서 금방 죽을 줄만 알았는데 신기했다. 작은 생명이 열심히 살아가는 게 참 기특했다.


졸업과 취업을 준비하며 숨 막히는 나날들. 지하 열람실 조그만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질 때마다 나는 칸막이 책상 위로 빼꼼 고개를 쳐들고 친구들의 꽃을 떠올렸다. 예쁘기도 하지. 속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다섯 그해, 수국의 계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새 7년이 흘렀다. 톡톡. 생일 축하해. 나는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른두 살이 된 우리는 이제 생일에도 만나기가 힘들다. 저마다 가족이 생기고 바쁜 사정이 있으니 휴대폰으로 축하 메시지와 기프티콘을 건네는 수밖에. 덕분에 주고받는 생일선물은 훨씬 빠르고 간편해졌지만, 우리 마주 보고 웃던 대화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꽃다발을 풀어서 화병에 꽂아두었다. 물에 담가 두면 그래도 일주일쯤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기억을 머금은 꽃을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수국은 딱 하루 더 활짝 피어나더니 금세 시들시들해졌다. 결국에는 다른 꽃들보다도 가장 먼저, 사흘이 가기 전에 완전히 시들어버렸다. 수국은 오래 살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때 친구들이 내게 주었던 것들을. 싸구려 선물을 건넨 주머니 사정을 모른 척했던 배려와 화분을 품에 안고 멀리멀리 전철을 타고 돌아갔던 마음을. 가만히 두면 시들어버릴 수국과 나에게 조심스럽게 쏟았던 정성을. 눈치도 없이 왜 몰랐을까. 선물은 오히려 내가 받았던 거였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나 그냥 솔직히 말할 걸 그랬어.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가까운 사이라서 더욱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날들, 마음이 마음에게 말했다. 다정한 마음이 가난한 마음에게.


미안해하지 마

잘 지내니?

많이 힘들지

기운 내


그런 말들이 소리도 없이 지나갔었다.

수국이 피던 계절에.

이전 01화 이봐요, 당신 삶이 아름다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