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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06. 2017

아주 평범한 기적

할아버지와 함께한 하루

외할아버지는 늘 아랫목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키도 크고 얼굴도 큼지막한 할아버지는 모로 누운 키다리 장승같았다. 꾸욱 다문 입술과 엄하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 각진 얼굴을 나는 자꾸만 쳐다보았다. 무섭진 않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면, 그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볼수록 다정한 얼굴이었다. 낯선 마을 어귀에서 고개를 쳐들고 우와 올려다보던 장승처럼, 할아버지는 나에게 커다랗고 근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말로 장승처럼, 문지방을 떠받치고 누운 할아버지는 무언갈 지키는 사람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지키는 게 아담한 외갓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뜨끈뜨끈한 아랫목이라고. 그도 아니면 낡은 텔레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외갓집은 바닷마을 산 중턱에 있었다.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은 외갓집에 더 자주 모였다. 명절이 아닌데도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땐 잘 몰랐다. 작은 집에 사람들이 복작거렸다. 할아버지 곁에 할머니와 이모들이 조르르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붙어 앉은 가족들의 온기로 방바닥이 자글자글 익을 동안, 우리 꼬맹이들은 해 질 녘까지 밖에 쏘다니다가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소금기 먹은 바닷바람이 불어왔고 밥 짓는 냄새가 짭조름했다. 퐁당, 해 떨어지는 금빛 바다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어슴푸레 저녁이 내려앉는 집. 열어놓은 방문으로 할아버지의 텔레비전 소리와 이모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아마 할아버지도 그때가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그날도 나는 사촌오빠들이랑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어른들은 다 목욕탕에 갔는지 집엔 할아버지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문턱에 앉아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할아버지는 말도 하셨다. "산 아래 가게 좀 갔다 오자."라고.


우리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행여나 넘어지실까 사촌오빠들은 경호 대열로 할아버지를 에워쌌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착한 산 아래 구멍가게. 먹고 싶은 과자를 골라보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냉큼 초코파이를 집어 들었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동전 한 줌을 꺼냈다. 그리고 백 원, 이백 원, 하나하나 세어서 계산했다. "잘 먹겠습니다." 과자를 손에 든 손주들의 인사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파른 언덕길에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붙잡고 몇 번이나 멈춰 쉬셨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걸었다. 나는 초코파이를 아껴 먹으며 할아버지의 기다란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며칠 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언젠가 엄마가 물었다. 할아버지를 기억하느냐고. 


"당연히 기억하지. 초코파이도 사주셨었어."

"정말? 언제?"

"돌아가시기 며칠 전쯤이었을 거야."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어. 할아버진 거동조차 힘드셨는걸. 꿈꾼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혀끝에 닿았던 초코파이의 단맛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할아버지를 보았고,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고, 할아버지의 환한 웃음을 보았다. 그토록 선명한 기억이 꿈일 리가 없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건 '기적'인 것 같다고.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거동조차 힘들었던 할아버지가 그토록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렸던 건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뭐 이래. 굉장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그날은 그저 평범한 여느 날 중에 하루. 특별한 징후도 대단한 사건도 없이 슬그머니 지나간 날이었다. 나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에겐 그냥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좋았고, 초코파이가 맛있었던 하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던 거라면, 할아버지가 문지방을 떠받들고 지켰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고마운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아팠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하나쯤, 어린 손주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 하나쯤은 선사할 수 있었던 기적이 지나가는 따뜻한 날들 속에 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날의 일을 거짓말, 꿈, 혹은 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초코파이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분이라고 기억하면서, 나는 빙그레 행복해진다.


외갓집에서 바라 본 산 아래 풍경. 할아버지와 우리는 이 언덕길을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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