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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13. 2017

한여름 소나기의 맛

마음 푸짐한 잔치국수 한 그릇

"비 올 땐 잔치국수지."


어린 날의 기억 하나.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국수를 만들었다. 커다란 그릇에 돌돌 만 하얀 소면을 담고, 초록 호박 노랑 지단 주황 당근 빨강 김치 고명을 올린 후, 뭉근하게 우려낸 멸치 육수를 부었다. 동그란 밥상 위에 달랑 잔치국수 세 그릇. 반찬 하나 없어도 괜찮았다. 간장 조금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기다란 면발을 힘차게 들이켜면, 입안 가득 채워지는 따뜻함이 나는 참 좋았다.  


열어둔 창밖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우리 가족은 모여 앉아 호록호록 국수를 먹었다. 국수를 먹을 때는 꼭 '호록호록' 소리가 났다. 호록호록 호록호록. 한여름 빗소리처럼 경쾌한 그 소리. 엄마 말마따나 비 올 땐 잔치국수라고. 비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 왜 이름이 '잔치국수'야? 묻자 엄마는 대답했다.


"글쎄다. 잔칫날 먹는 음식이라서? 잔칫집 음식처럼 먹고 나면 마음이 푸짐하라고?"


국수라는 게 요즘이야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잔칫날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어. 엄마 어렸을 땐 잔칫집에 가면 커다란 솥에다 국수만 종일 삶아냈거든. 그럼 꼬맹이들은 국수 삶는 아줌마 옆에 앉아서 고것만 보는 거야. 배고플 시절이니 삶아도 삶아도 계속 나오는 국수가 얼마나 배부르던지. 그날의 잔치국수는 정말이지.


"무진장 마음이 푸짐한 맛이었다구."


엄마는 나만한 꼬마였던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마음이 푸짐한 맛은 뭘까. 잔칫집에 가본 적이 있어야 알지. 아이 잘 모르겠다고. 나는 국수만 먹었다. 호록호록 먹다 보면 그 많은 면발이 금세 다 사라졌다. 남은 국물마저 깨끗이 비우고 나면 따뜻한 국물이 뱃속에서 찰방거리는 것 같았다. 아아. 따뜻하다. 배부르다. 솔솔, 잠이 온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나는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짐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잔치국수를 그리워하는 어른이 되었다. 집에서 잘 차려 먹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시간도 손재주도 없어서 나는 대부분 끼니를 바깥 음식으로 해결했다. 더구나 프리랜서로 일하고부터는 거의가 혼자 먹는 밥이었다.


혼자서도 밥 잘 먹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왠지 어색하고 처량해서 후닥닥 해치워 버리곤 했다. 밥을 먹고는 있지만 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일 인분의 음식은 왜 이렇게 금방 식어버리는 거냐고. 꾸역꾸역 삼키는 밥은 정말이지 맛이 없었다. 너무 쓸쓸했다. 나는 어느새 혼자 밥 먹고 혼자 밥투정하는 쓸쓸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otos1207/220741900646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해 서 있는데 길 건너에 노란 불빛이 보였다. 작은 국숫집이었다.


시장통에서나 볼 법한 허름한 가게. 아주머니 두 분이 조리실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국수를 삶고 있었다. 실타래 같은 면발을 들어 올릴 때마다 커다란 솥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안개처럼 자욱한 김 사이로 국숫집 노란 전등이 반짝 빛났다. 무슨 신기루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제대로 챙겨 먹은 게 없었다. 갑자기 못 견디게 배가 고팠다. 평소라면 집에 포장해갈 일이었지만, 그날은 비도 피할 겸, 막 나온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었다. 나는 국숫집으로 뛰어갔다.


가게 안은 만석이었다. 하지만 빗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만 왕왕 울릴 뿐,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대부분이 비를 피해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아가씨, 저기 앉아요.' 주인아주머니의 막무가내 손길에 떠밀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낯선 사람이 앉아있었다. 얼떨떨하게도. 내 생애 첫 합석 식사였다.


나는 잔치국수를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휴대폰을 보는 척했지만, 자꾸 앞에 앉은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쩍 보니 정장 차림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회사원이었다. 이 여름에 넥타이와 재킷만 봐도 더워 보이는데,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잔치국수를 먹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국수만 먹느라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왠지 그게 나 때문인 것만 같아 괜히 미안했다.


잠시 후, 국수가 나왔다. 넘칠 듯 푸짐한 양이 후딱 비우긴 힘들 것 같았다. 하긴 국수를 다 먹는대도 비가 그치기 전에는 꼼짝할 수가 없으니, 나는 이 어색한 자리에서 최대한 천천히 국수를 먹어야 했다.


'호록호록'


국수는 눈치도 없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호록호록. 어색하니 호록호록. 쓸쓸하니 호록호록. 내 밥그릇 말곤 시선 둘 곳이 없으니 귓가엔 그저 호록호록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 소리만이 아니었다. 내 앞에, 내 옆에, 내 뒤에. 혼자 국수 먹는 사람들의 소리가 '호록호록 호록호록'하고 작은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안심이 됐다. 문득,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이 국수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만한 가격에 넘칠 듯 푸짐해서, 단순히 젓가락질만 해도 어색함이 무뎌져서, 헛헛한 속을 채우는 국물이 따뜻해서, 나뿐만 아니라 가게 안에 모두가 쓸쓸한 사람들이라서 다행이었다.


국수를 먹으며 엄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의 이름이 '잔치국수'인 이유, 그리고 따뜻한 국수를 나눠 먹었다던 잔칫집의 풍경을. 특별한 날 동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푸짐한 음식을 먹는 곳이 잔칫집이라면, 지금 이곳도 다름없었다. 소나기가 퍼붓는 저녁에 배고픈 사람들이 비를 피해 이곳에서 푸짐한 국수를 먹고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는 잔칫집에 놀러 온 손님들 같았다.


허기와 음식은 모두에게 공평했고, 이곳에 모인 우리는 맛있게만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누구 하나 불편하지 않았다. 내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어쩌면 마음가짐의 문제였을까. 그까짓 혼자 먹는 밥이 뭐라고 나는 여태 굶고 있었을까. 매일 혼자 먹던 밥이 그 순간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호록호록. 나는 쓸쓸한 속을 따뜻하게 채우고서 씩씩하게 세상 구경 나가고 싶어졌다.



국수를 다 먹고 밖에 나섰다. 비를 피한 보람도 없이 여전히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여름 저녁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빗물에 반사된 온갖 색들이 선명하게 빛나고. 쏴아아아. 요란한 소리와 들뜬 공기가 세상을 가볍게 더 가볍게 두드렸다. 빗물이 힘차게 튀어 오르는 거리에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가는 사람들, 가방이나 옷가지로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나처럼 그냥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어차피 우산으로 피할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을 발걸음도 가볍게 사부작사부작 걸어갔다.


집에 도착했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에 쫄딱 젖어서 꼴이 엉망이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비 맞고 집으로 돌아온 길, 좋을 일은 하나도 없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는 걸까. 웃을 때마다 따뜻한 국물이 뱃속에서 찰방거리는 것 같았다. 아아. 따뜻하다. 배부르다. 얼른 뜨거운 물로 씻고 한숨 자야지. 방바닥에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생각했다. 나 오늘 잔칫집에 놀러 갔다 온 것 같다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짐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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