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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7. 2017

순간이 나를 붙잡은 순간

처음 내 이야기를 썼던 날

영화 <보이후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순간을 붙잡으라는 말이 있잖아,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야."


누구나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 마음속에 남은 기억과 추억 같은 것들. 모두 내가 붙잡은 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은 아니다.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찡하고 마음을 울리고 마는 그런 순간이 있다. 순간이 나를 붙잡은 순간. 내겐 그날이 그랬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한 10년쯤 시간이 지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열일곱 살이었던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그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 한 가족이 부서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란이 지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불행이 필요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긴긴 시간 불행이 일상처럼 머물렀다.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으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웃는 얼굴을 썼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공부 잘하고 잘 웃는 착한 아이. 하지만 내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조숙한 아이로 살았다.


부모님이 헤어지자 나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했다. 떠나기 전, 우연히 백일장에 참가하게 됐다. 소설가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글도 쓰는 자리였는데, 자유로운 분위기답게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써보라고 했다. 나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동안 솔직한 이야기를 쓴 적이 없었다. 곧잘 지어내거나 그럴 법한 이야기로 원고지를 채우곤 했다. 그런 글로 상을 받은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글을 쓴 나도, 글을 읽은 심사위원들도 다 별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떠날 사람이었고 상 욕심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는 심정으로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달렸던 이야기였다.


가장 늦게 교실을 나선 날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게 내 불행의 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일지 모를 일이다. 다만 혼란스러웠다. 불행한 일상이라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건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없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 힘없는 열일곱 살 여자애일 뿐이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멍하니 텅 빈 운동장만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곳,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어나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구겨진 운동화를 뒤축을 고쳐 신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지쳐버릴 때까지 나는 달렸다. 


처음으로 쓴 솔직한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이 덜컥 상을 받았다. 수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소설가들의 심사평을 듣고 단상에서 작품을 낭독해야 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낯선 사람들에게 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글을 심사평 해준 사람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소설가였다. 수더분한 인상에 수줍음이 많은 사람 같았다. 그가 작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글을 읽고 노래 '마이웨이'가 떠올랐습니다. 한 편의 노래 같은 글이었어요.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글쓴이의 솔직한 목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을 써줬으면 좋겠어요. 그날의 달리기처럼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나는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글을 쓴 사람이 나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일 줄이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설가는 나와서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람들 앞에 섰다.


더듬거리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읽지도 못했는데 목이 메었다. 더 읽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둘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에 풍경만 천천히 움직였다. 창가로 옅은 주황색 햇살이 비쳐 들었다. 눈부셨던 실루엣들이 하나둘 선명해졌을 때,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분해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을 줄 알았다. 아무도 내 이야기 들어주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낭독을 마쳤다. 순간이 나를 붙잡은 순간이었다.



얼마 후, 나는 낯선 곳으로 떠났다. 상황만 조금 다를 뿐, 예전과 비슷하게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속내를 보이지 않는 아이였고, 이따금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는 잠자리에 누워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지는 않았다. 대신에 글을 썼다. 빈 종이에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이 지금에 이르렀다.


그날을 여러 번 되감아 본다. 내가 글을 낭독하지 않았다면, 진심어린 심사평을 만나지 않았다면, 솔직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면, 백일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저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순간이 나를 붙잡았던 그 순간 이후로 내 삶은 바뀌었다.


현실에서 도망쳐 시간을 달리고 싶었던 여자애는 이제 달리기를 그만뒀다. 지금, 살아있는 순간을 느끼며 천천히 걷기로 했다. 여전히 쉽진 않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저 불행하기만 한 삶은 없다. 살다보면 불행한 순간도, 슬픈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마음을 울리는 순간도 만나게 된다. 그 순간들로 채워진 시간이 나를 만들었다.


똑딱똑딱.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 속에는 수없이 많은 순간이 반짝인다. 순간을 단숨에 지나치려 하지 않고, 모든 순간을 잡으려 애쓰지 않고. 순간이 나를 붙잡을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가는 것은 꽤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순간에 붙잡힌다 해도 좋을 일이다.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삶이 나를 살아가게 하기도 하니까. 어떤 순간에는, 살아있음 그 자체가 우리를 살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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