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채소 다지기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 때 30년 된 채소 다지기를 쓴다. 진짜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돌돌이'라고 불리는 다지기인데, 어머님이 주신 것이다. 어머님은 남편이 꼬꼬마였던 시절부터 이 돌돌이로 볶음밥이나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이 물건은 어림잡아도 서른 살은 거뜬히 넘었을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나랑 동갑내기다. 그래선지 첫 만남부터 친근했다.
조금 촌스럽게 생긴 서른 살 돌돌이. 푸르스름한 투명 플라스틱 통에 회오리 모양으로 붙어 있는 칼날을 조립한다. 그 위에 두툼한 검은색 뚜껑을 덮고 빨간색 손잡이를 끼운다. 그리고 돌돌돌 돌린다. 채소가 말끔하게 다져진다. 생김새는 투박하지만 3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아직도 튼튼하다.
이 돌돌이를 쓸 때마다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30년이란 시간 때문일까.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한 이 물건이 타임머신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돌돌돌 돌돌돌.
나는 어느새 남편이 뛰놀던 그 옛날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통통 튀어가는 남편 뒤꽁무니를 쫓아 그가 살았던 작고 따뜻한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남편과 나란히 식탁에 앉아, 젊었던 어머님이 만들어준 볶음밥 한 끼 얻어먹고, 남편의 통통한 볼따구를 힘껏 꼬집어주고 돌아오는 상상을 한다.
오늘은 돌돌이를 돌리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옛날에 봤던 만화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주문은 외우던 타임머신 돈데크만. 생각해보니 그 녀석 주전자였다. 채소 다지기라고 타임머신이 아닐 이유는 없다.
돌돌돌 돌돌돌. 주문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이 물건이 나는 쓸 때마다 정답고 뿌듯하다. 동갑내기 이 녀석을 30년쯤 더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때까지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먼저 결혼할 아들에게 물려주겠다고. 대를 이어 물려줄 물건이 기껏 채소 다지기라는 게 좀 겸연쩍긴 하지만, 그건 한낱 낡은 물건이 아니라 부지런히 살아온 시간의 모양일 것이다. 그럼에도 튼튼한 쓸모의 가치일 것이다.
나이 든 물건도 여전히 쓸모가 있다. 쓸모 이상의 쓸모가 있다. 나이 든 물건이 많은 부엌과 집과 시간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