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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Dec 22. 2017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을까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팔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 이상국 '달이 자꾸 따라와요'



금요일 밤 지하철 타고 글 쓰러 가는 길. 내리는 4-1 플랫폼에서 항상 이 시를 마주친다. 이건 내가 처음 이 시를 발견한 날 찍었던 사진이다. 내내 엄마로 살다가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금요일 밤. 그날도 나는 시간에 쫓겨 조급했고 사람 많은 지하철이 낯설었고 차창에 비친 내 모습에 풀이 죽어 있었다. 혼자이고 싶어 이어폰을 찾았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라 허둥대다가는 사람들 모두 사라진 플랫폼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 마침 적절한 음악이 흘렀고 나는 멀뚱히 선 채로 시를 읽었다. 따뜻했다.


밤길이 무서운 어린 아들. 어렸을 적 나인지, 내 어린 자식인지 모를 '아들'은 달이 자꾸 따라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뚝뚝하게 대답한다. 아버지와 아들, 그렇게 밤길을 걷다가 걷다가 돌아봤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인지, 나인지 모를 '아버지'가 내버려둬라 했던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시 한 편에 삼대의 세월과 정이 모두 담겨있다. 특히나 마지막 시구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곱씹는다.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던 달을 기억한다. 부모님의 허리춤에도 머리가 닿지 않던 시절. 가로등 하나 없는 깜깜한 흙길 따라 시골집으로 돌아가던 밤, 바닷마을 산동네 할머니집 꼬불꼬불 언덕길을 올라가던 밤에. 제 발조차 보이지 않는 까만 땅바닥이 무서울 때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에 커다란 달이 떠 있었다. 저만치 걷다 한 번, 또 한 번 돌아보아도 초롱초롱 빛나는 노란 달이 나를 따라왔다. 어서 가자. 조그만 손을 잡아주던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따뜻했다. 그게 엊그제 적 같은데, 시간은 흘러 흘러 그때의 사람과 풍경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에 나는 그 밤들을 기억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랑받고 보호받았던 기억은 깜깜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이제는 내가 조그만 손을 잡아주어야 할 때, 언젠가 남편과 두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밤길에도 심심한 달은 자꾸 따라올 것이다. 그 밤의 풍경을 슬쩍 엿본 것 같아 행복해진다. 버겁다 생각한 오늘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나 어릴 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을까. 하늘 한 번 올려다볼 마음이 생긴다. 홀로 걸어가는 밤길이 무섭지 않다.


모두가 따뜻한 글 덕분이다. 아. 이런 글 쓰고 싶다 생각하며 글 쓰러 간다. 아직 나 이런 따뜻한 글은 못 쓰더라도, 쓰는 글에 따뜻한 마음이라도 스며들기 바라며. 오늘도 밤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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