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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r 12. 2018

할머니 참 예쁘세요

월요일의 할머니

안구건조증이 심해져 안과에 갔다. 콘택트렌즈를 빼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나는 지독한 근시인지라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눈이 흐려지면 머리조차 흐려지는 걸까. 멍하니 앉은 채로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눈이 참 예쁘네."


고갤 돌리자, 내 곁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희뿌연 윤곽과 꽃무늬 스카프와 목소리만. 다정하고도 명랑한 목소리였다. 타인에게 눈이 예쁘다며 허물없이 말을 걸 정도라면, 마음도 서그러운 어른일 듯 싶었다.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예뻐. 그냥 젊음 그 자체가 예쁜 거지. 첫째 손녀가 아가씨 뻘이라 말 걸어보고 싶었다우. 원래 지방서 살다가 서울에 잠깐 올라왔어. 둘째네 애를 내가 보고 있거든. 손녀가 예쁘긴 한데, 요즘 사춘기라 하도 예민해서 힘들어. 어쩌다 보니 나는 평생 동안 뭘 키우고 있네. 자식들 키웠더니 손주 키우고 있고. 참, 개도 한 마리 키웠었지.

 

어쩌다 개 이야기가 나왔다. 할머니가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며 말했다.


"예전에 요만치 조그만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산 적이 있었어. 그때 마당에다 개 한 마리를 키웠거든. 근데 개가 참 똑똑하더라고. 보통이 아니야. 목욕을 시키고 나면 집 안에서 몸을 털지 말라고 했어. 물이 사방으로 다 튀어서 엉망이 되거든. 개 눈을 바라보면서 말해. '너 집 안에서 몸 털면 안 돼!' 그러면 요놈이 얼마나 똑똑한지 고분고분하게 밖으로 나가서는 몸을 터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개들이 똑똑하다 못해 여간 영악한 게 아니야. 사람도 가리지 뭐야."


이야기를 얼마나 맛깔나게 하시는지, 나는 할머니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개가 사람을 가려요?"

"응. 군대 다니던 셋째 아들이 휴가 받아서 집에 오면, 저 멀리 대문 밖에서도 발소리만 듣고는 아는 거야. 벌써부터 벌러덩 뒤집어 누워서는 애교 부려. 그리 오래 집을 비웠는데도 다 아는 거야. 그뿐인가. 울 영감이 대문을 오갈 때도 꼬리를 요래요래 흔들면서 달려들고 난리도 아니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가면은, 참나."


"왜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나를 빤히 쳐다봐. 밥 주러 왔구나 싶어서. 꼬리도 안 흔들어. 난 그냥 밥 주고 똥 치워주는 사람인 거야. 집안사람들이 다 나를 그렇게 대하니까 지도 그렇게 대하는 거지. 그놈이 개인데도 얼마나 서운한지."


듣고 보니 씁쓸한 이야기였다.


"에이, 개가 못됐네요."

"아니야. 더 기가 막힌 건 사람들이지. 그렇게 개를 좋아라 예뻐라 하는 가족들 중에서 정작 누구 하나 개밥 한 번 챙겨준 사람이 없었어. 내가 다 했어. 사람이나 개나 똑같애. 아주 저들밖에 몰라. 내가 왜 그러고 살았을까..."


할머니는 헛헛하게 웃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만. 나는 무슨 말이든 할머니 편을 들고 싶었다.


"할머니가 가족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야. 사랑이 아니야. 그거 그냥 책임이야. 지겨워. 정말 지겨워."


자식을 키우고 자식의 자식을 키우는 삶. 엄마니까, 할머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삶이 실은 상당히 버겁고 지겨웠음을. 가족들은 알고 있었을까. 타인에게나 넋두리로 털어놓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자못 쓸쓸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땠었나 돌아보다가 서늘해졌다. 나 역시 당연한 사랑에 무심했던 순간마다 '저들밖에 모르는' 못된 자식이었으니까. 우리 엄마에게도 그런 식으로 상처 주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어느새 손녀와 통화 중이셨다.


"응. 할미 병원 왔어. 밥해놓은 거 있지? 그거 챙겨 먹고 학원 갔다 와. 응. 할미 빨리 갈게."


지겹다 지겹다 하시면서도 목소리가 다정하다. 뭔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 그냥 '할머니' 하고 불러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 예쁘세요."


할머니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할머니도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밥은 먹었어? 어디 아픈 덴 없고? 나야 별일 없지. 엄마는?"


너무 당연해서 일상이 되어 버린 사랑에게 그냥 사소한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시콜콜 하루의 일과를 말하는 동안, 수화기 너머 엄마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엄마의 목소리에도 주름질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엄마가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어도 나는 “우리 엄마 참 예쁘다” 말해 주는 딸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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