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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May 04. 2018

응답하라 1999

금요일의 불꽃놀이

남동생이 무려 19년 전 일을 사과했다. 때는 바야흐로 1999년 12월 31일. 그날 밤은 특별했다. 다가올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해 제야의 종이 울리면 불꽃놀이를 한다고 했다. 작은 바닷마을에서 뭐 그런 것까지 했었나 싶지만, 돌이켜보면 동해 바다를 끼고 있는 일출 명소인 우리 동네는 새해만큼은 아주 요란했던 것 같다.


게다가 밀레니엄이라니. '밀레니엄'이라는 낯설고 세련된 외국어는 뭔가 세계적이고 대단한 기념일 같았다. 그날 밤 카운트다운을 하고 나면 2000년이었다. 연도의 모든 자리 숫자가 바뀌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형형색색 불꽃이 피어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면... 상상만 해도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동네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우리 아파트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옥상만 올라가도 하늘과 가장 가까이에서 불꽃을 볼 수 있을 터.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우리 불꽃놀이 보러 가자."


혼자는 심심하고 무서워서 동생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던 내 동생은 '싫어'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거 평생 볼까말까한 엄청난 일이란 말이야. 같이 가자."

"싫다니까. 너나 가."


녀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의 미간이 한껏 구겨지던 그 순간, 둘 사이에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14살과 12살, 철없는 두 살 터울 남매였던 우리. 툭하면 퍽하고 싸우던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결국 그날도 대판 싸우고 말았다.


2000년 1월 1일 00시. 밀레니엄을 알리는 제야의 종이 울렸다. 펑펑, 창밖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리고 나도 펑펑, 방구석에 처박혀 울었다. 나쁜 놈. 끝까지 돌아보지도 않냐. 남동생의 얄미운 뒤통수를 째려보며 꺼이꺼이 울었다. 우리의 21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동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팅팅 부은 개구리 눈이 된 거야. 속으로는 정말 미안했는데, 막상 미안하단 말을 못 했어. 생각해보면 나 진짜 철이 없었던 거 같아. 성격이 이상해서 특별한 날이면 꼭 가족들이랑 싸우는 거 같기도 하고. 그때 왜 그랬을까.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갈걸. 계속 후회했어. 미안해. 누나."


동생의 진심 어린 사과에 나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그날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불꽃놀이를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19년 동안 미안하다고 담아둔 일을 정작 당사자는 기억하지 못하니 동생만 억울할 노릇이었다. 나보다 더 당황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독 미안한 기억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기는 영 쑥스럽고.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또다시 서운하게 만드는 사람.


"있잖아. 옛날에 내가 너 때려서 코피 났던 거 기억나? 네가 아끼던 미니카 부쉈던 일은? 네 저금통 몰래 빼 쓰다가 싸운 일은?"

"누나가 그랬었나?"

"응. 나도 너한테 그랬었어. 그러니 됐어."


우리가 가족이라서 그래. 나는 슬며시 덧붙였다. 우리는 밉고 서운하고 미안하고 쑥스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말로 다 해 뭐해. 그 마음 이미 알고 있는 걸. 내가 까맣게 잊었던 그날을 동생이 기억해주어 고마웠다. 그래도 특별한 추억이 남았으니 좋은 거라고.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 거라고. 반쪽짜리 추억을 더듬으며 우린 마주 보고 웃었다.


어느덧 2018년의 봄. 생각보다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21세기를 사는 어른이 된 나는 가끔 동생과 함께했던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싸우지 않았을까?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까?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그날 밤을 반드시 기억하고 싶다. 훗날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뜨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응답하라 1999. 들리는가? 들리면 응답하라.

펑펑, 불꽃이 터지던 우리 남매의 마지막 밤을!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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