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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Jul 25. 2018

히어로는 의외로 귀여울지도

오늘, 우리 사는 이곳이 평화로웠던 이유

남편이 비닐봉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돌아왔다. 어딘가 들뜬 얼굴로.


이거 봐. 대뜸 휴대폰으로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는 남편.

자동차 앞 유리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귀여운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뒷바퀴에 새끼 고양이가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이 녀석이야. 남편이 웃으며 다른 사진을 보여줬다.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자동차 뒷바퀴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더위를 피해 자동차 아래 잠든 새끼 고양이


남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남편. 빈 계산대를 두리번거리다 편의점 밖 자동차에 무언갈 붙이는 직원을 발견했다. 스물 초반 앳된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남편은 서둘러 들어와 계산해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자동차 밑에 고양이가 잠들어 있어서요.


편의점을 나서자 길가에 서 있는 검은 자동차. 앞 유리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쓴 종이가 붙어있었다. 쪼그려 앉아 아래를 살펴보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세상모르게 낮잠 자고 있더란다.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래서 사진 찍어왔다고 했다. 네가 봤다면 좋은 글 한 편 썼을 텐데. 나 작가 남편 다 됐나 봐. 걷다 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 종알거리던 남편이 물었다. 고양이 귀엽지?


"응. 너무 귀엽다."


나는 모두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한낮 더위를 피해 자동차 아래 잠든 새끼 고양이도, 급히 스프링 노트를 찢어 '조심해 주세요!!' 글을 써 붙인 아르바이트생도, 아이스크림 봉다리를 들고 무심한 얼굴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은 남편도. 종이를 발견하고 조심조심 자동차를 옮길 차주인도 분명 귀여울 것이다. 모두가 귀여웠다.


타고나길 귀여운 존재가 있는가 하면, 의외로 귀여운 존재가 있다. 사소한 일에도 기꺼이 수고로움을 발휘한다거나,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선뜻 나서서 도와준다거나,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따뜻한 일을 묵묵히 행한다거나. 누군가에게서 그런 의외의 면을 발견할 때, 나는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귀여운 존재들이 다른 귀여운 존재들을, 작고 약하고 소외된 존재들을 지켜준다. 마치 오늘처럼.



새끼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고양이가 신경 쓰여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종이를 발견한 자동차 주인은 고양이를 살피며 조심조심 차를 옮겼을 테고. 아무것도 모르고 일어난 새끼 고양이는 미야오 하품하고 엄마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골목은 평화로웠을 거야.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무사히 흘러갔을 거야.  


남편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했다. 선의나 정의 같은 것들. 쉽게 베풀기 어려운 커다란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거리낌 없는 가벼운 마음이 아닐까. 자동차 아래 잠든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위해 쏟는 여러 가지 작은 마음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는 근육질에 잘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히어로는 의외로 귀여울지도. 바보 같은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다가 나는 배시시 웃었다.


오늘, 우리 사는 이곳이 평화로웠던 이유.

내 곁에 당신 곁에 히어로가 산다.



@suri.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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