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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Sep 03. 2019

빙그레 행복했던 나의 라디오

EBS <오디오 천국> 녹음 후기

지난 8월 초, EBS 라디오국에 다녀왔다. EBS <오디오 천국>이라는 프로그램에 브런치 작가들이 직접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고 소개하는 '나도 작가다' 코너 녹음에 참여했다.


내가 쓴 글을 내 목소리로 녹음한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에 낭독할 글을 고심하며 골랐다. 나는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 실린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글 '아주 평범한 기적'을 낭독했다.






정규방송은 아니지만 대학시절 대학 방송국에서 오디오 방송을 진행한 적 있다. 물론 목소리가 좋지 않은 나는 아나운서가 아니었고, 취재하고 글 쓰는 기자도 아니었으며, 의외로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던 피디였다.


대학 방송국 피디였지만 부원이 적은 관계로 오디오 방송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원고와 선곡, 진행까지 30분짜리 생방송 하나를 앞두고 며칠을 고생했다.


마침내 라디오 부스 안에서 첫 방송을 시작하던 순간. 아직도 선명하다.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 숫자가 카운드 다운을 시작하고 이어서 반짝, 온에어 불빛이 켜졌다. 나는 마이크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고수리 피디입니다."  


순간 헤드폰으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고 부끄러운지. 나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로봇처럼 다다다다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귓가에 내 목소리보다 내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마이크로 새어 나가면 어쩌나 걱정하며 원고를 읽었다.


첫 곡이 나갈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새빨개진 얼굴을 기억한다. 그리고 묘하게 들뜨고 뿌듯했던 기분도 기억한다. 내가 쓴  내 목소리로 낭독하는 기쁨, 아마도 나는 그걸 그때 처음 경험했던 것 같다.  



EBS <오디오 천국>에서도 대학시절 방송을 준비하던 마음으로 짧은 오프닝 원고를 썼다. 타고난 아나운서가 아니라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겠다 생각했다. 목소리가 탁월하 않아도 진심은 전해질 거라 믿었다.


EBS 라디오국에서 담당 피디님을 만나 엄청나게 크고 멋진 라디오 부스에 앉았다. 녹음 시작 전, 피디님이 오디오 콘솔을 체크하는 동안 헤드폰을 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덩그러니 고요하고 긴장된 이 공기가 반가웠다. 반짝, 온에어 불빛이 켜졌다. 나는 마이크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를 쓴 작가, 고수리입니다."


헤드폰으로 아무래도 어색하고 별로인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꿋꿋이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이 방송을 들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사소하거나 특별하거나. 유독 선명하게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있으신가요?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까요. 왜 그런지 모르게 잊을 수 없는,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더라고요. 살아가는 데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소중한 기억이자 다정한 마음이죠.


저는 외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의 기억을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에겐 어떤 기억이 있는지. 어떤 사랑이 남아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BS 라디오 부스에서


'아주 평범한 기적'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할아버지와 마지막 추억을 적은 글이다. 이 방송을 들을 엄마와 이모들을 생각하며 글을 읽었다. 내 책을 읽고서 엄마와 이모들은 울먹이며 고맙다고 전화해 왔다.


'수리야, 우리 엄마아빠를 기억해줘서 고마워. 글로 남겨줘서 고마워.'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책을 내고서 가장 기뻤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소중한 날들을, 이젠 세상엔 없는 누군가와 보냈던 따뜻한 날들을, 기적이 지나가던 고마운 날들을 내가 붙잡아 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날의 일을 거짓말, 꿈, 혹은 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초코파이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분이라고 기억하면서, 나는 빙그레 행복해진다."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남겨둘 수 있어 기쁘다. 분명 엄마와 이모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좋은 기회를 주신 EBS '오디오 천국' 제작진에게 감사드린다. 내가 쓴 글을 낭독하며 빙그레 행복했다.


그렇게 완성된 7분 35초짜리 짧은 오디오 클립.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들어도 좋을 테고. 혹시 글씨를 읽지 못하시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계시다면, 그분들께 들려드리고 싶다. '여기 어떤 작가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랑 초코파이 먹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데요.' 면서.


http://www.podbbang.com/ch/1772869?e=23157824


담당 피디님이 찍어주신 사진들.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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