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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17. 2019

흔들릴 때마다 글쓰기

고요한 밤, 홀로 글 쓰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흔들리는 배 안에서 고정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이제 잠을 청할 수 있다.

- 김승주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71p


어느 여성 항해사가 쓴 책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 그었다. 3만 톤의 배를 운항하는 스물일곱 살의 여성 항해사. 한번 배에 오르면 6개월은 바다를 떠돈다. 계절과 날씨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유일한 여성 선원으로 밀려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혼자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양팔을 둘러 스스로를 껴안아주며 버텨내기 위하여. 흔들리는 밤의 바다 위에서 홀로 글 쓰는 그녀를 상상하면, 어느 밤 침대 맡에 앉아 글 쓰던 내가 겹쳐진다. 그 시간의 공기와 온도와 마음이 만져질 것만 같다.  


캄캄하고 외롭고 흔들리는 곳이 바다뿐일까. 누구의 삶이건 그런 시기가 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감정이 오르내리고 밤새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시기가. 어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던가. 스물아홉은 원래 그런 거라고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 스물아홉의 나에게는 힘든 일들이 연달아 몰려왔다. 몸도 마음도 멀미에 시달렸다. 툭, 부딪쳐오는 아주 작은 것에도 나는 지나치게 울렁거리고 치밀어 올랐다.


스물아홉의 나는 위로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싫었다. 위로의 노래도 듣기 싫고 위로의 영화도 보기 싫고 위로의 책도 읽고 싶지 않았다. 위로해주겠다는 사람도 싫었다. 무언가, 누군가가 나를 달래주는 것이 싫었다. 어딘가에 의지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어째서 스스로 나일 수는 없는 걸까 생각하다가는 그런 나조차도 싫어져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나는 날마다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이 되어갔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재촉하며 초조하게 생활했다. 건조한 용건들만 나누고 타인의 호의를 모른 척했다. 누군가의 실수를 발견하면 은근히 무안을 주었다. 관계에 너그러울 줄을 몰랐다. 언제부턴가 내 곁의 사람들도 말수가 줄어들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둘러본 어느 순간, 나는 나의 불안을 곁에 떠넘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주 별로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날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짐했다. 나의 불안은 내가 껴안기로. 어차피 잠들지 못할 바에야 잠들지 않기로 했다. 캄캄한 밤 침대 맡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 불빛 아래 글을 썼다. 하나둘 나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만큼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 걸지 않아도 괜찮았다. 양팔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린 만큼이어도 충분했다. 양팔을 둘러 스스로를 껴안아주기만 해도 충만했다. 나는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그제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멀미가 그쳤다.


(c) Maija Annikki Savolainen


그런 밤들을 보내며 서른이 되었다. 서른에는 쓰던 글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올렸다. 서른하나에는 쓴 글들을 모아 첫 책을 냈다. 서른둘에는 두 아이를 낳고 돌보며 절실히 글을 썼다. 서른넷에는 두 번째 책을 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이제 그녀는 누구에 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이렇게 혼자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녀가 이따금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었다—사색에 잠기는 것, 아니 심지어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 말없이 혼자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가 팽창하고, 반짝이고, 증발해서 우리의 존재가 엄숙하게 오그라들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쐐기 모양의 어둠의 핵심, 다시 말해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90p


글을 쓸 때마다 90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썼던 문장을 새긴다. 흔들릴 때는 흔들려야 한다. 흔들림에 익숙해져야 한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누구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가 되어야 한다. 혼자가 되었을 때 생각해야 한다. 써야만 한다. 나에 대하여.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나만 아는 진정한 나에 대하여.


이제는 익숙해져 미세한 진동을 자각하진 못해도 여전히 삶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서른을 넘기고, 부모가 되고, 작가가 되고 나서는 그런 삶이 자연스러워졌다. 흔들리고 있는 삶에서 이따금 평온함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잔잔해졌다.    


고요한 밤. 홀로 글 쓰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의 굽은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주고 싶다. 글 쓰던 여성 항해사의 말을 달리 전해주고도 싶다. 흔들리는 삶에서 고정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사람뿐. 그러나 흔들리는 삶에서도 우리는 잠을 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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