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Sep 10. 2021

그냥, 생각이 나서

놓쳐버리면 평생 오지 않을 그런 전화가 있단다

옛 친구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설거지하는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잊고 지냈던 이름. 둘 다 결혼한 후로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한때는 당연했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갑자기 어쩐 일일까. 앞치마에 물기를 닦아내고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선뜻 다시 전화할 수 없었다. 때마침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 나는 주저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옛 친구의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 다시 전화해야 하나, 어떤 얘길 꺼내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 엄마는 다 안다는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수리야. 다시 전화해 줘라. 아주 오랜만에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는 받아야 해. 못 받았다면 네가 다시 걸어야 하는 전화란다. 그 사람이 너에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의아하고 어색하더라도, 서운하더라도. 그저 반갑게 맞아줘라. 별 이야기 아니어도 그저 다정하게 통화해라. 놓쳐버리면 평생 오지 않을 그런 전화가 있단다.”


놓쳐버리면 평생 오지 않을 전화. 그 말에 깨달았다. 아직 나는 이 관계를 붙잡고 싶다는 걸. 힘껏 용기 내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았고, 변함없는 목소리에 나도 활짝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아기 옹알이가 들렸다.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일은 그만두고 지방에서 아이들 키우던 시간이 좀 외롭고 힘들었다고. 둘째를 낳고 산후우울증을 앓았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청소를 하다가 예전에 네가 보내준 편지를 발견하곤 무작정 전화를 걸어보았다고. 친구는 덤덤히 말했다.


“애들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이제는 부모님들 아프기 시작하시고.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마음이 먹먹해. 사는 거 바쁘다고 연락 한번 제대로 못했네. 그냥, 생각이 나서. 너는 잘 지내려나.”


“그럼, 잘 지내지.” 힘주어 대답한 말에 온 마음이 담겼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보다 곱절의 시간이 지났어도,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구나. 친구가 지나온 시간이 사무치게 이해되어서, 보태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 담아 애써 담담하게 전해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래도 가끔 이렇게 연락하자. 잘 지내. 아프지 말고. 정말 잘 지냈으면 좋겠어.”


긴 통화를 마치자 달아오른 휴대전화가 뜨거웠다. 데워진 두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잠시 그러고 있었다. 그리움이란 거, 절절하게 뜨거운 마음인 줄 알았는데 저릿하게 쓸쓸한 마음이었구나. “그냥, 생각이 나서.” 이 한마디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너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붙잡고 싶은 우정이야.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야. 나는 오랫동안 친구를 생각했다.



2021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관계의 재발견] 칼럼을 썼습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 떠올리는 이름이 있다면 용기 내어 전화해보기를요. 별 이야기 아니어도 그저 다정하게 통화하는 가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