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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12. 2021

환절기

우리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라고

환절기에는 어김없이 아프다.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서 한나절 고생하다가는 감기약을 사 먹는다. 멍청한 정신에 밖은 쌀쌀하고, 그 채로 목적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걷다 보면 이 계절은 꼭 겪어본 꿈처럼 느껴진다. 내가 걷고 있는 감각과 보고 있는 풍경이, 이상하리만큼 살아있구나 실감나서 그게 좀 신기하다.


걷던 길의 풍경이 바뀌었다. 낡은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 손들은 발갛게 물들었고, 바닥에 엎드려 자기만 하던 큰 개는 모처럼 일어나 인사하듯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일기를 쓰는 카페를 찾아가 밀린 일기를 썼다. 창가 같은 자리에서 일기를 쓰다가 일기장을 덮은 지 꼭 14일 만이었다. 그 사이 하루도 쓰지 않아서 14일 치 일기가 텅 비어 있었다. 세상에.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사라진 14일 동안 무얼 했나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메모와 메시지와 사진들을 증거 삼아 거꾸로 하루와 하루를 추리하며 밀린 일기를 썼다. 순서는 뒤죽박죽이래도 선명히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현관문 밖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신발들을 정리하던 어둑한 오후. 좋아하는 외투를 꺼내 입고 일부러 돌아 걷던 비 내리는 골목. 종이컵에 미지근한 녹차를 우려내어주던 동료의 손길.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야.”라던 친구의 말. 놀이터에 누워서 “이렇게 누우면 꼭 비가 오는 것 같아” 하늘을 보던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나의 얼굴. 플라타너스 마른 잎을 밟다가 무언갈 부서뜨리는 것 같아서 두려워진 기분. 모르는 글씨로 쓰여진 책을 오래도록 읽던 정오. 주인이 분명 꽃말이 ‘기쁨’이라고 일러준 꽃을 샀는데, 찾아보니 ‘수수께끼’라는 꽃말이었다는 사실. 그런 꽃을 선물했다가 비밀로 간직한 날의 마음. 택배 상자를 열다가 우울이 후두둑 쏟아지는 기분에 일부러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닦던 노력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기록하면서도 나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카페에 머문 사람들에게 어울릴 법한 노래를 골라 틀어주는 카페 주인의 마음과 노랫소리가 커질 때마다 볼륨을 줄여주던 세심한 배려 같은 것. 이런 것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기억나지 않을 ‘아무것’에 다 뭉뚱그려 잊혀져 버릴 텐데. 그게 너무 아까우니까. 그래서 쓰는 거라고 쓰면서 생각했다.


쓰다 보니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다 보니 손바닥에 잡아두고 싶은 낮볕 같은 장면들이 하나둘 기억났다. 다행히 시간은 지나가 버린 게 아니라 바뀌고 있었다. 우리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고. 바뀌고 있다고 알아챌 수 있도록 예민해져도 좋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었다. 추워지니 좋다. 날씨가 추워지니 따뜻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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