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나아가는 사람들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휠체어 가게가 있다. 오가며 지나칠 뿐이지만 휠체어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보이지 않았을 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주 휠체어 탄 사람들을 마주쳤다. 때마다 나는 무심한 듯 조심스럽게 지나가곤 했는데, 내가 커다란 쌍둥이 유아차를 끌고 갈 때 느꼈던 마음과 비슷할 것 같아서였다.
두 아이를 태운 유아차를 몰 때에 나는, 누구보다 커다란 몸집으로 느리게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몸집과 걸음에 비해 세상은 비좁고 가파르고 급했다. 유연하게 빠르게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겐 간단한 이동조차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행인들이 기다려주지 못할까 봐, 차들이 너그럽지 않을까 봐, 모두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까 봐. 잔뜩 긴장한 채로 움츠리고 걸었다. 겪어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그러나 열너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툴게 휠체어를 모는 모습을 발견했을 땐, 무심한 척 앞질러 갈 수 없었다. 바퀴는 느리게 나아갔다. 소년의 휠체어를 에워싼 가족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의 눈길과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대신에, 소년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듯 허공에 손을 대고 휠체어와 발맞추어 걷고 있었다. 네 사람이 한 몸처럼 느리게 나아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비좁은 골목길에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도 뒤따라 걸었다. 가족들이 휠체어 가게에 다다랐을 때야 조용히 곁을 지나쳤다.
잠시 후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들을 마주쳤다. 근처 인적 드문 길가에서였다. 소년은 새 휠체어에 적응 중이었다. 수동휠체어에 전동 키트를 달고 컨트롤러를 조작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아까처럼 소년의 휠체어를 둥글게 에워싸고 바퀴를 따라 느리게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아챘다. 바람이 세찬 영하의 추운 날이었는데도 아무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 맨손으로 컨트롤러를 만져보며 익히는 소년 때문이리라. 손이 얼어도 일부러 장갑을 끼지 않는 사람들, 바람을 맞으면서도 발맞추어 걷는 사람들. 느리게 나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노을빛이 가족에게 쏟아졌다. 담벼락에 그림자가 비쳤다. 휠체어를 에워싼 가족의 그림자는 느리게 나아가는 돛단배 같았다. 돛단배라는 말을 생각했다. 돛을 단 배. 바람에 밀려 나아가는 배. 이들을 위해 무얼 빌어줄 수 있을까. 그저 어떤 바람에도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느리게, 그러나 조금씩 멀리. 그들과 멀어지며 장갑을 벗었다. 물결을 밀듯이 풍경의 끝자락에 손을 대어보았다. 너그러운 빛이 손바닥에 스몄다. 춥지만은 않았다.
2022년 1월 14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관계의 재발견] 칼럼입니다. 우리도 느리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발맞추어 걷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춥지만은 않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