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까멜리아 싸롱] 1화
밤.
눈송이 하나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윽고 눈송이가 하나둘 밤의 숲으로 바다로 지붕으로, 그리고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로 떨어진다. 동백섬에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바다는 죽은 듯 짙고도 고요했다. 잔잔한 물결 위로 기묘하리만큼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랐다. 늘어난 눈송이가 어지러이 날리는 사이 달은 차츰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달빛이 내리비추는 바다는 일렁이는 보랏빛. 신비로운 바다 위로 흰 눈이 내렸다. 미야오. 창가에서 검은 고양이가 울었다.
“첫눈이네요.”
지원우는 읽던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녹색 터틀넥 스웨터에 단정한 흑발, 창백하리만큼 투명한 얼굴이 창문에 비쳐 보였다. 어딘가 집요하게 살피는 듯 서늘한 눈빛과 무언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 묘한 미소가 유리창에 겹쳐졌다. 서가에서 LP를 정리하던 여순자가 돌아보았다. 상아색 실크 블라우스에 붉은 숄을 두른 초로의 여자. 고풍스러운 원형 안경을 고쳐 올리며 물었다.
“달은?”
“만월입니다. 그리고, 붉습니다.”
일순 순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창가로 다가가 선홍빛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쩜, 예뻐라. 예쁘기도 하지.”
“붉은 달은 좀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루비처럼 영롱한 선홍빛인걸. 알도 아주 크고. 저런 루비 목걸이 하나 목에 걸으면 이 늙은이도 반짝일 텐데.”
“이미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아무렴. 더는 나이 먹을 일 없으니 기품 넘치는 지금의 미모로 만족한다네. 반백 년 만에 첫 홍월(紅月)이라니,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오실 모양이야. 신경 써야겠어.”
“예스, 마담.”
굵어진 눈발은 함박눈으로 변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에도 달은 흐려지지 않고 더욱 영롱하게 붉었다. 달을 올려다보며 순자가 물었다.
“자넨 달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음…… 달이구나?”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봐.”
“밤에만 보이는 지구의 위성이 여기서도 보이는구나?”
순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갓 태어난 아기 본 적 있나?”
“아뇨.”
“갓난쟁이 얼굴이 꼭 저 홍월 같다네. 아기는 말이지. 태어나자마자 첫 숨을 쉬면서 울어. 까랑까랑한 소리로 안간힘을 다해서, 조그만 핏덩이가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로 힘껏 운다네. 숨이 돌고 피가 돌고 눈물이 돌고.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다네. 세상에, 얼마나 기특해. 얼마나 예뻐.”
“갓 태어난 인간은 빨갛군요.”
“그래서 내가 샤갈의 그림을 아낀다지. 나이가 들면 빨간색이 좋아진다던데 정말로 그래. 보는 순간, 첫눈에 단숨에 행복해지거든.”
순자의 시선 끝에는 샤갈의 그림 〈생일(The Birthday)〉이 걸려 있었다.
“원우 자네도 그리 힘껏 울면서 태어났다네.”
“그렇습니까?”
“믿을 수 없나?”
“믿을 수 없다기보단 믿기지 않아서요. 아기였던 때는 기억나지 않거든요. 인간의 기억은 대체로 네 살쯤부터 생성되고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기억하는 기억만 믿습니다.”
“자네가 믿는 기억이란 건 기록이겠지. 하지만 진짜 기억은, 뭐랄까, 진실을 상상하는 일에 좀 더 가깝다네.”
“진실을 어떻게 상상합니까?”
순자는 제 가슴께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주름 팬 깊은 눈으로 원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원우 씨, 조금만 마음을 열어봐. 겪어본 적 없어도 겪어본 것처럼. 마치 그 사람이 되어본 것처럼. 진정 자기 자신이 되어본 것처럼.”
“예스, 마담. 서가도 활짝 열어볼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미 말끔히 정리해 두었거든요.”
원우는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예의 바르게 선을 긋는 그만의 제스처였다. 1분 1초 정확하게 움직이는 시계처럼 째깍째깍, 원칙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은 기록을 다루는 사서, 원우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외롭고 동그랗게 째깍째깍. 다정하게 선을 그으며 곁을 주지 않는 원우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고이 간직한 상처가 있을 거라고 순자는 짐작했다. 그래서 늘 원우가 애틋했다.
“어쩜 한결같아. 한결같이 인간미가 없어.”
“따지고 보면 인간은 아니니까요, 마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세계, 이상한 시간, 이상한 존재들. 붉은 달을 올려다보던 원우는 쥐고 있던 회중시계를 열었다. 8시 20분.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작인가요?”
벌컥 현관문을 열고 눈을 뒤집어쓴 유이수가 달려 들어왔다. 빨간 후드 망토를 아무렇게나 벗자 후드득 바닥에 눈이 떨어졌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는 삐죽 헝클어져 있었다.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곤 헤실거리며 뒷걸음치는 이수, 레드 타탄체크 스커트가 팔랑거렸다.
“녀석아, 눈 털고 가야지!”
뱃고동처럼 우렁찬 목소리. 문에 닿을락 말락 거대한 백곰 같은 마두열이 나타났다. 쿵쿵 뒤따라 들어오다가 그대로 이수와 부딪혀 와르르, 바닥에 눈을 떨구고 말았다. 씨익씨익 거친 숨을 몰아쉬는 두열. 그의 험상궂은 얼굴이 순자와 원우를 발견하자 함빡 환해졌다.
“하하하. 끝내주는 첫눈입니다!”
“언덕에선 더 크게 보여요. 그죠, 아저씨? 무슨 보름달이 꽃처럼 빨개요. 너무 신기한 거 있죠.”
“이수 이 녀석, 눈밭에 풀어둔 강아지가 따로 없어요. 쫓아다니느라 아주 애먹었어요. 그나저나 첫눈이 함박눈이라니 낭만적이지 말입니다. 예감이 좋습니다.”
이수와 두열이 들어왔을 뿐인데 집 안이 환하고 따뜻해졌다.
“암만. 첫눈 내리는데 이 정도 호들갑은 떨어야지. 두열 씨 등대는?”
“예쓰, 마담! 오시는 길 어둡지 않도록 환히 밝혔습니다. 객실 점검도 완료했고요.”
“이수는 이번이 처음이지?”
“예스, 마담. 어떤 손님들이 올까요? 너무 설레요.”
순자는 응접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검은 고양이가 순자의 발치로 다가와 샛노란 눈을 깜박였다. “바리야.” 순자가 미소 지으며 싸롱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호두나무 탁자가 멋스러운 서가에는 책과 LP가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바로 옆에는 타자기와 오래된 축음기, 턴테이블과 커다란 스피커가 놓였고, 오래된 피아노가 창가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자리 잡았다. 맞은편으로 기다랗게 이어진 바에는 커피 머신과 빈티지 주전자와 커피 잔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응접실 중앙에는 커다란 동백나무와 비파나무, 포인세티아 화분이 자라고, 패브릭 안락의자들과 초록 소파가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복도까지 이어지는 벽면에는 여순자의 그림 컬렉션이 조르르 걸렸고, 크고 작은 조명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노랗게 빛났다. 세월과 낭만과 취향이 고스란히 응축된 공간.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 페르시아풍 카펫을 밟고 선 순자는 어김없이 이 순간이 설렜다.
“까멜리아 싸롱에 첫눈이 내립니다. 모두가 편히 쉬어 가시도록,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도록, 우리 최선을 다해봅시다. 까멜리아 싸롱, 문을 엽니다.”
여순자와 지원우, 마두열과 유이수, 검은 고양이 바리. 까멜리아 싸롱 직원들을 마주한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올랐다.
“마담, 좀 더 따뜻하게 불을 지필게요. 음악은요?” 원우가 순자에게 물었다.
“오늘 밤에는 쇼팽의 〈이별의 노래(Etude Op. 10 No. 3)〉가 좋겠어. 조 스태퍼드가 부른 번안곡 〈노 아더 러브(No Other Love)〉로. 기대된다네. 이별의 끝엔 또 어떤 만남이 있으려나.”
원우는 낡은 LP를 찾아 올리고 축음기 태엽을 감았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올리자 팔각 나팔 원통에서 지지직거리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
까멜리아 싸롱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눈송이들이 창가로 지붕으로 바다로, 그리고 숲으로 조용히 내려앉는다. 죽은 듯이 고요한 동백섬에 흰 눈이 쌓인다. 어두운 것들 모두 덮어주며 부드러운 눈의 융단이 펼쳐진다. 외딴섬에 유일한 집. 섬 꼭대기에서 등대가 별처럼 반짝거릴 때, 붉은 달빛이 까멜리아 싸롱을 감싸안는다. 기다리던 첫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