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이 어려운 건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던 고깃집은 서서히 시들어가며 스러져갔다. 손님 발길은 뚝 끊겼고 직원들이 차례차례 떠나갔다. 직원들은 투명 비닐봉지에 손수 만든 나물과 김치를 쌌다. 불룩해진 가방을 양 손으로 받치며 가벼운 목례와 함께 쪽문으로 퇴장했다.
어느 날 야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식당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쪽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카운터에 앉아 한동안 손님 쪽을 노려봤다.
어머니가 소주 한 병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며 손님의 옆자리에 앉아 한참을 웃고 떠들던 그 밤, 아버지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던지기 기술을 뽐냈다.
어머니의 자작시가 프린팅된 컵이 가게 창문에 부딪쳐 와장창 깨지던 날, 나는 직감했다.
‘아, 장사 끝이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아버지에겐 그 날의 풍경은 버티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장사는 안 됐고 직원은 모두 나갔고 와이프는 손님 옆에 앉아 웃음을 파는 꼴이라니… 그는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뚜렷하게 특정하지 못했다.
다만 컵을 던지고, 개업 때 받은 난에 소변을 누었다.
취기가 오를수록 자괴감과 열등감도 함께 차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무언가를 던졌다.
아버지는 구기 종목 선수가 되었어야 했던 것일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에게 욕을 했다.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나를 잠시 빤히 보더니 그대로 고깃집을 나갔다.
나의 반항에 아버지가 동요했던 것일까. 묘한 뿌듯함이 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내 나이 11살, 어머니와 처음 만난 이후, 우리는 어머니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생년월일을 몰랐고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한 때 부유했고 다복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해 낙향한 여성이라는 것만 알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의 다이어리 속에서 생년월일을 알게 됐을 때, 아버지는 한동안 어머니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진즉 다이어리를 오래 전부터 몰래 보고 있었던 터라 어머니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어쨌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5살이나 많았다는 것에 아버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의 생일은 12월이었던 것 같다. 거리에서 캐럴이 울렸고 가끔 눈이 내렸다.
나는 평소보다 2시간은 일찍 일어나 미역을 불렸다. 태어나서 미역은 처음 만져보았다. 재료 손질부터 맛의 구현까지 1도 아는 것이 없었다.
미역이 어느 새 산처럼 쌓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받았던 충격이 여전히 떠오른다. 생일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들고 싶은데… 미역을 다짜고짜 불려놓았다고 혼이 날까봐 두려웠다.
검정 봉지에 반절을 덜어내 꽁꽁 묶은 다음, 내 방에 숨겨두었다.
그 날 나는 마늘을 넣긴 했을까. 간장이랑 소금은 제대로 넣었을까. 무얼 넣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의 고맙다는 한 마디에 우리는 잠시 울컥했다.
여전히 쓸쓸하고 외로웠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의 온기가 짙어지는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좀 더 나의 마음이 뜨거웠더라면, 내 언어가 덜 초라했더라면… 어머니의 깨진 마음을 더 어루만질 수 있었을까. 당시 내가 발휘할 수 있었던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첫 아이와 둘째를 출산했을 때 시어머니는 종종 남도에서 사 온 미역으로 국을 끓여주셨다. 산모에게 좋은 거라며 미역귀를 꼭 넣어서 끓였는데, 나는 애를 낳고 나서야 미역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어머니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했다. 소고기를 오랫동안 끓이며 붉은 거품들이 허옇게 될 때까지 계속 건져 올렸다. 미역을 볶지 않고 박박 씻은 다음 그대로 끓였다. 시어머니의 미역국은 담백하고 개운하기까지 해서, 밥 두 공기는 수월하게 말아먹곤 했다.
19살의 나처럼 여전히 미역국이 어렵다.
미역과 간장의 양도, 사람의 마음도 아직도 계량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