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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아티스트 유유 Jan 05. 2019

저 상고 나온 여자예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

Photos by 달콤 아티스트 유유



저 상고 나온 여자예요.



저는 미대를 졸업하지 않았어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경리로 취직을 했으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날마다 돈을 세고, 차 시중을 들었죠. 제가 번 돈으로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감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네, 그때는 아무도 제 꿈에 관심이 없었죠.



월급날이 돼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 돈을 주고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날마다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둘러 은행을 가고 있는데 작은 꽃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어요. 칠판에 적힌 글귀 때문이었죠. "견디기 힘든 오늘을 살다 보면, 살고 싶은 내일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버티고 버티다가 힘이 들 때면 그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상고를 나와서, 일찍 감치 퍽퍽한 사회생활을 경험해서, 입시 미술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집에서 나를 지원해주지 않아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었다고. 



원하지 않은 일을 해봤기 때문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게 됐어요. 아무도 내 재능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스스로 전폭적인 지지를 쏟게 됐죠. 마음껏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완벽한 이유



경리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 고졸이라는 단출한 이력서를 쥐고 퇴사를 했어요. 그나마 사이버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 희망의 끈이 되었죠. 변변한 학벌도 자격증도 없는 상태에서 취미로 만들었던 포트폴리오 하나만 들고 일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어린이 영어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의 디자인팀 막내로 들어간 것이 꿈을 향한 제대로 된 첫걸음이었어요. 그전에 숱하게 많은 회사에서 거절을 당했고, 제가 들어간 회사도 합격자가 출근하지 않아서 급하게 저를 부른 것이었죠. 하지만 대타여도 좋고,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도 좋았습니다. 매일, 매일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부터였어요. 스스로에게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된 것이.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상고를 졸업한 학력과 경리로 일했던 경력. 그리고 딸의 꿈에 무관심했던 부모님이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의외로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웹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다가 돌연 그림책 작가의 길로 접어들거나,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아이들을 그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100명이 있다면,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100가지가 존재합니다. 



그렇다 보니 재능을 따지거나 전공자를 운운하는 모습을 볼 때면 혼자 씩 웃으면서 '아무 의미 없다.'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리는 사람의 선택 의지. 그리고 마음이니까요.






CREDIT

달콤 아티스트 유유 (이유미)

Portfolio www.dalkomartist.com

Instagram @dalkomartist

blog www.eyumi.net


29살에 사표를 내고 평생 꿈이었던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됐습니다. 자기사랑을 통한 마음 치유 과정을 진솔하게 담은 책 《소심토끼 유유의 내면노트》을 펴냈고, 국민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어요. 2011년부터 지금까지 달콤 페인터 워크숍을 운영하면서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을 돕고 있습니다.



그림을 사랑하는 그림학교, 달콤 페인터

 DALKOMPAIN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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