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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북스 김희영 Jan 06. 2023

6살, 유치원과 홈스쿨 사이의 고민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다

오늘 으누를 보낼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다른 지역은 유치원 접수가 예전에 끝났겠지만 이곳은 전원 7명 규모의 작은 유치원이라 언제 전화를 걸어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고민의 시간을 갖느라 전화가 늦었다.



제주의 외곽마을 작디작은 학교의 병설 유치원이다. 시골의 학교답게 시설이 좋다. 운동장은 천연 잔디, 대공원에 있을 법한 대형 놀이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고, 클라이밍, 수영장 등의 체육시설이 있다. 한라산이 눈앞에 보이고, 멀리는 제주바다가 보이는 그림같이 예쁜 학교다. 소풍으로 제주의 유명한 자연명소를 다닌다. 이런 곳이라면 내 아이를 보내도 좋겠다 싶었다.



으누는 또래 친구가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으누의 성향에 딱 맞는 곳이다. 5~7살 통합반이긴 하지만 전교생이 10명 미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자연 속의 유치원이다. 굳이 숲 유치원이 아니라 정말 주변 전체가 자연 그 자체다. 자연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은 나의 육아관과 딱 맞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결정을 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것인지 홈스쿨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 환경을 갖췄기에 굳이 보내지 않으려면 그럴 수 있다. 올해 한국 나이 6살이 될 때까지 데리고 있지 않았는가. 이제는 집에서 본인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그 시간에 혼자서 영어와 숫자를 익히며, 자연과 우주를 탐구하는 아이로 잘 자라고 있다. 



잘 놀다가 아이는 한 번씩 심심해한다. 엄마 아빠가 놀아주어도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는 심심함에 몸부림을 치며 멍하니 보내는 그 시간 동안 무한한 상상력을 펼친다. 그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본인만의 큰 꿈을 꾸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사실, 나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지금처럼 홈스쿨, 아니 언스쿨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 정형화된 교육과정이 아닌 자연 속에서 배우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아이의 관심사와 호기심에 따라 스스로 익히고 배우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지금처럼 심심함에 몸부림을 치다가 그 안에서 지적 호기심을 키우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한글, 영어, 숫자를 따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스스로 터득해 익히는 지금처럼 자연과 독서만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



그럼 유치원을 안보내면 될 텐데 현실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남편과 나의 업무시간 확대가 필요하다.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업무에 더 집중을 하고, 아이가 하원을 하면 더 밀도 있게 시간을 보내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종일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기에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의 사회성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래보다 말이 느린 것도 또래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기회를 계속해서 주지 않는 것 또한 나의 판단이므로, 우선은 아이에게 그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홈스쿨을 나 혼자 결정하는 것은 나의 이기심인 것 같다. 아이에게 공동생활의 경험도 하게 한 후 자신의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하게 되었을 때, 그때 함께 의논해봐도 늦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우선은 3월부터 보내보려고 한다. 6살이 되었음에도 내 눈에는 아직 아기 같은데, 과연 유치원에 가서 잘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공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집에서 제멋대로 큰 시간이 길어서, 유치원에 가서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또래보다 느린 탓에 또래 친구들에게 주눅이 드는 것은 아닌지, 낯선 공동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쩌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힘이 들면 어쩌지 등 초보맘은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러다 아이를 본다. '엄마 저는 잘할 수 있어요. 저를 믿어주세요.'라고 말하는 듯이 아이의 눈빛이 엄마의 마음을 감싸준다. 그러다 문득 이건 아이를 위한 걱정이 아닌, 나를 위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낯선 장소를 유난히도 싫어했다. 3월 2일은 나에게 공포의 날이었다. 새 학교, 새 학기, 새 교실, 새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교적이지 못한 나는 그들에게 적응하는 데 오래 걸렸다. 물론 적응을 하고 나면 그 누구보다 친구들도 많고 잘 지냈지만, 적응을 하기까지의 그 시간이 참 많이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느린 아이였다.



너무나도 나를 닮은 아이라서 나는 으누에게 나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 스트레스를 애초에 차단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6살이 된 지금까지도 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의 편안한 품 속에서 편안하게만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마음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의 품을 떠나 사회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 모두가 삶의 일부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이 내면의 힘을 기를 시간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나와 다른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나와 다르다.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다. 으누는 으누다. 어쩌면 내 걱정보다도 훨씬 더 잘 해낼지도 모른다. 아이를 믿어보자.



용기는 아이가 아닌 엄마인 내가 필요한 것 같다. 아이를 믿고 지켜봐 주는 엄마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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