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다망하면 공사가 다 망한다는 진리의 고백이자 캐나다행을 결심한 이유
나는 커리어의 마지막 시기를 유독 힘들게 겪어냈다. 아이가 하나였다면 수월하였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한동안 발목을 잡고 나를 우울하게 했을 정도였다. 원인은 다 내 욕심이었다. 나는 어느 쪽 하나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둘째를 낳으면 프로젝트 욕심은 내려놓든지, 회사일에 집중할 요량이면 아이는 할머니들 손에서 어련히 크리라 믿고 맡기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건만. 아이가 내게 조금이라도 거리를 둘라치면 조바심을 내고 괜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니 프로젝트를 욕심만큼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또 한껏 예민해졌다. 안팎으로 날을 세워대는 나를 견디느라 온 가족이 힘들어했다.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부터 친정 옆으로 아예 이사를 하고 더부살이하다시피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도 엄마가 없으면 안 됐다. 창피하지만, 집안 살림부터 아이들 교우관계까지 친정엄마의 몫이었다. 육아를 잘하고 싶다던 내 욕심은 어디로 갔느냐고? 정직하게 그건 마음뿐인 욕심이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대체 어느 누가 양이 부족하면 질을 채우라고 했던가. 함께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일단 내가 내 아이를 잘 몰랐다. 유심히 살필래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해야 하는 것인데 도통 그러질 못하니 어느 날 돌아보면 달라져있고, 다시 보면 또 저만치 커져있는 아이들이라 고품질 육아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실 '고품질' 육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도.
그러면 진즉에 그만두고 아이들 옆에 붙어있지 남편도 약사이면서 뭘 그렇게 회사에 목을 맸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같은 일을 십 년 넘게 하다 보면 출구전략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고 답할 수밖에. 한동안 일이 너무 재미있을 때가 있었다. 내가 담당한 품목 허가에 협의가 잘 되면 도심 한복판의 매캐한 공기마저 달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월급으로 치환할 수 없는, 자존과 흥미. 그냥 그런 것들을 단칼에 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작년즈음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하더라고. 내가 왜 지명이나 엘리처럼 살 수 없었는지, 내가 왜 한국에서 살면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나는 전형적인 '자산성 행복 추구자' 유형이다.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주어지면 순간의 행복은 자꾸 뒤로 미룬다. 미루고 미루다 지금, 당장에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내내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다. 사회적인 결함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부침 탓일 것이다.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일을 했다. 부서 사람들의 성향이 다들 비슷했으니까. 그중에도 유독 성향이 비슷하여 선후배사이면서도 친근한 동료처럼 지냈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하늘나라에 갔다.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듣기는 하였으나 나보다 겨우 다섯 살 위인데, 우리 아이들과 동년배인 두 아이들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If의 인생처럼 이것만 하면, 또 이것만 해내면, 하고 자꾸 미루다가는 그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그저 막연히 호주나 캐나다처럼 땅덩이가 넓어서 보기만 해도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서는 마음가짐도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령 내가 그 무엇이 아니어도, 조금 더 적나라하게는 돈을 벌어오는 유용한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마음이 달음박질쳐 멈춰 서도 멈춘 것이 아니었으니.
빈소에 다녀온 다음날 유학원에 상담을 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